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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52강

제 4장 한국의 순교자들 2

황사영 알렉시오

반역의 지식인, 민족과 사회의 구원을 꿈꾸다

천주교에 비교적 온전한 정책을 펴던 정조가 죽고 순조가 즉위한 뒤 신유박해(1801년)가 일어났다. 황사영 알렉시오(1775~1801년)는 이 과정을 냉철히 지켜보던 지식인이다. 황사영은 어려서부터 신동 소리를 들으며 자랐다. 그는 16세에 진사 시험에 합격하여 정조의 총애를 받았던 천재다. 그러나 이후 그는 정약현의 사위로 주문모 신부에게 세례를 받은 신자가 되었다. 그래서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한양을 떠나 제천에 있는 배론의 교우촌 토굴에 은거했다. 그의 이러한 은거 생활은 8개월간이나 지속되었다. 그는 토굴에 머물면서 지금 조선에서 일어나는 박해 사왕을 보고 교회를 구해야겠다는 강렬한 염원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1801년 10월에 이러한 염원을 적어 북경에 있는 구아베 주교에게 보낼 계획을 세웠다. 이 서신은 길이 62cm, 너비 38cm의 흰 명주 비단에 검은 먹으로 한 줄에 110자씩 121행, 총 1만 3천3백여 자를 깨알같이 써 넣은 것으로, 말그대로 비단에 쓴 백서帛書였다. 하지만 이 서신은 조선을 발칵 뒤집어 놓았다. 이 문서로 인해 황사영은 조선이 망한 후에도 매국노이자 반역자가 되었다. 하지만 이는 황사영의 절박한 호소를 민족 국가라는 잣대로만 평가한 탓이다. 황사영이 백서에 제시한 우리나라의 난국 타개 방안은 크게 도득황지圖得皇旨, 내복감호內服監護, 양박청래洋舶請來로 이른바 삼조흉언三條凶言이다. 우선 도득황지란, 무고한 백성인 천주교 도들을 잡아 처형하는 조선 정부를 제어하도록 청나라 황제에게 종주권 행사를 요청한 것이다. 그리고 둘째 내복감호란, 조선과 청나라 간 언어와 의복을 섞어 왕래를 편하게 하여 서양 선교사가 조선에 쉽게 들어올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양박청래란, 서양의 군사와 무기를 실은 큰 배가 와서 조선의 국왕이 선교사를 받아 들이고 우호 조약을 맺어 신앙의 자유를 얻도록 강제해 달라는 것이었다.
황사영의 백서는 입장에 따라 다양한 관점에서 볼 수 있다. 천주교의 입장에서 보면, 황사영 자신에게 세례를 주었던 주문모 신부를 비롯한 천주교인들이 순교하는 모습을 교구에 알리는 보고서이자 새로운 성직자를 보내 달라는 영입 청원서이지만, 조선 정부의 입장에서는 외교 간 섭을 통해 조선의 굴욕을 청원하는 매국과 반역의 문서인 셈이다. 그래서 이 백서를 본 조정은 '글자마다 흉악한 뱃심이고, 글귀마다 역적의 심장'이라며 분노했다.
황사영의 백서는 결국 구베아 주교에게 전달 되지 못했다. 황사영은 백서를 전달하고자 했던 밀사 황심 토마스, 옥천희 요한과 함께 잡혀 혹독한 고문 끝에 순교하였다. 황사영은 대역 죄인으 로, 먼저 목이 잘린 후 시신을 여섯 토막을 내는 육시형을 당했다. 그리고 황사영의 어머니 이윤혜는 거제도로, 그의 부인이자 정약현의 딸인 정난주 마리아는 제주도 대정골로 유배를 갔다.

비단 위에 적은, 새 세상을 위한 간절함 오늘날로 치면 황사영은 양박청래의 원흉이고, 백서는 국가 전복을 기획한 문서다. 하지만 백서를 읽다 보면 임금마저 인정한 국가의 인재가 그리스도교라는 신앙을 지키기 위해 얼마나 애썼는지를 알 수 있다. 그는 신앙인으로서 믿음을 지키려고, 이 백서에 간절히 호소했다.
게다가 당시는 박해를 통해 인권이 유린되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이 백서는 유신 독재 시절에 국가 폭력에 의해 일방적으로 인권이 유린당했을 때 인권을 지키기 위해 국제 사회에 호소해야 했던 시민들의 경험과 일맥상통한다. 이 백서에는 보편적 인권이 무방비하게 짓밟히던 시대에 국가의 경계를 뛰어넘는 보편적 권위에 호소하려는 절박한 배경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19세기 조선은 박해의 시대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핍박받던 민중이 들고일어나는 민란의 시대이기도 했다. 곧, 혁명과 반정을 꿈꾸고 실행에 옮기던 시대이기도 했다는 말이다. 그래서 황사영의 백서를 단지 신앙의 자유라는 측면에서만 보기보다 사회 구원과 민족 구원이라는 거시적 차원에서 보려는 시도가 필요하다. 신유박해 당시 죽음을 택한 이들 가운데는 반상의 신분 차별, 남녀 차별, 전제 군주제를 넘어서서 새로운 평등 세상을 꿈꾸던 이들이 많았다. 이와 마찬가지로 황사영 역시 새로운 시대, 새로운 세상을 꿈꾼 혁명 의식을 갖고 있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시대는 황사영을 만고의 역적으로 낙인찍었다. 그래서 오늘날에도 그가 시복되는 것을 두고 논란이 벌어지고 있다. 2014년 124위 시복식에 서 신유박해 순교자는 54위로 가장 많았다. 그러나 그의 이름만은 찾아볼 수 없었다. 

김대건 안드레아 성인

조선 땅에 자신의 피를 봉헌하다

김대건 안드레아(1821~1846년) 신부는 지금의 당진인 충남 내포 솔뫼에서 태어났다. 그는 증조부부터 할아버지, 아버지에 이르기까지 대대로 순교한 집안 출신이었는데, 어린 시절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려진 바가 없다.
1831년 조선교구가 설정되고 나서 파리 외방 전교회는 방인 성직자를 양성하겠다는 방침을 세웠다. 이 방침에 따라 피에르 모방 신부는 김대 건과 최양업, 최방제를 신학생으로 선발하여 그들을 마카오 신학교로 보냈다. 소년 김대건은 그 때 이미 "앞으로 조선 교회를 위해 몸 바치겠다." 라는 굳은 의지를 드러냈다.
김 신부는 우여곡절 끝에 1845년 8월 17일, 만24세 때 조선교구 제3대 교구장이던 페레올 주교에 의해 상하이 푸동 지역의 금가항소품에서 사제로 서품을 받았다. 일주일 뒤 조선인 첫 사제 가 봉헌하는 첫 미사는 다블뤼 신부가 보좌를 했 는데 집전 사제인 김대건 신부, 그리고 그와 미사를 드렸던 다블뤼 신부 모두 훗날 조선 땅에서 자신의 피를 봉헌하고 삶을 마감한다.
1845년 10월, 김대건 신부는 페레올 주교, 다블뤼 신부와 함께 배편으로 강경 나바위 교우촌으로 입국했다. 그들은 한양을 중심으로 수원 용인 일대에서 비밀스러웠지만 열정적인 사목 활동을 펼쳤다. 그러나 1846년 6월, 김대건 신부는 만주에 머물고 있던 메스트르 신부의 입국을 돕기 위해 서해안 길을 개척하다가 백령도 근처 순위도에서 체포되었다. 그는 곧 해주 감영으로 압송되어 심문을 받다가 한양으로 이송되었다.
김대건 신부는 "나는 광둥성 마카오에서 자랐 으며, 천주교인입니다. 호기심과 내 종교를 전파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이곳에 오게 되었습니다."라고 자신의 신원을 알렸으나 교회나 다른 신자들에게 해가 갈 만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고, 이 때문에 모진 고문을 받았다. 일찍이 서양 학문을 익히고 라틴어와 프랑스어에 능통했던 김대건 신부의 재능을 알아본 헌종 임금은 배교하면 그를 조정에서 중히 쓰겠다고 회유했지만 김대건 신부는 죽음을 간청하였다. 결국 그는 새남터에서 참수되었는데, 참수되기 전 김대전 신부는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나는 이제 마지막 시간을 맞이하였으니, 여러분은 내 말을 똑똑히 들으십시오. 내가 외국인들과 교섭을 한 것은 내 종교를 위해서였고, 내 천주를 위해서였습니다. 나는 천주를 위해 죽는 것 입니다. 여러분이 죽은 뒤에 행복하기를 원한다면, 천주교를 믿으십시오. 천주께서는 당신을 무시한 자들에게는 영원한 벌을 주시는 까닭입니다." 김대건 신부는 불과 만 25세의 나이로 순교했다. 그리고 그가 사제로 산 시간도 단지 13개월에 불과하다. 그중 2개월은 조선 입국을 위해 배 위에서, 4개월은 감옥에서 온갖 고초에 시달렸다. 따라서 그가 목자로서 신자들과 함께한 시간은 겨우 7개월 남짓이다. 그러나 사제로서 그의 삶은 강렬했다. 그리고 그는 순교를 당당히 받아들임으로써 한국 가톨릭교회의 반석이 되었다.

피로 세운 교회의 반석


한국 최초의 사제가 순교했다는 점은 우리에게 큰 의미가 있다. 김대전 신부는 순교가 스승이자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고 따르는 일 이라고 굳게 믿었다. 순교가 하느님 앞에 참으로 영광스럽고 가치 있는 일임을 굳게 믿은 것이다.
그는 "우리 주 예수 세상에 내려, 친히 무수한 고 난을 받으시고 괴로운 데로조차 성교회를 세우시고 고난 중에 자라게 하셨기 때문"이고 하 면서 박해의 고통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더 욱 가까이 본받고자 하였다. 게다가 그는 민중과 민족에 대한 사랑 위에 신앙의 가치를 더한 인물이었다. 따라서 그를 조선 이라는 나라를 개혁하고자 했던 시대의 예언직 을 수행했던 사제라고 평가할 수 있다. 그는 비록 사목 활동을 얼마 하지 못했지만 조선 백성에 대한 선교 의지와 열정으로 불타고 있었다. 그는 해외에서 조선으로 돌아갈 날만을 두 손 모아 기다렸고, 조선 신자들이 목자 없는 양떼처럼 방황하 는 것을 매우 안타까워했다. 그는 인간의 삶의 의 미한 목적이 하느님의 섭리 안에 있다는 것을 굳 게 되었으며, 온갖 난관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서 우리를 보호해 주시고 길을 안배해 주시리라고 믿었다. 그래서 어렵고 험한 길이지만 권력에 대항하여 새로운 길을 여는 개척자로서의 삶을 살았다.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는 1857년(철종 8년)에 하느님의 종으로 선포되었고, 1925년에 복자품에 올랐다가, 1984년에 한국을 방문한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에 의해서 성인품에 올랐다.

안중근 토마스 의사

이웃을 위해 목숨을 바치다


안중근 토마스 의사(1879-1910년)는 박해 시대의 순교자들 못지않은 인물이다. 우리는 그의 모습에서 선조 순교자들의 영성이 신앙 속에 깊이 뿌리내려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는 일제 강점기 에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척결했다. 이는 그가 민족애와 깊은 신앙심을 가진 인물이었 기에 할 수 있었던 일이며, 자신의 목숨을 바쳐서 조국을 구하고자 하는 염원을 갖고 있었기에 할 수 있었던 일이다. 결국 죽을 수밖에 없는 행동이 지만 그는 모든 이웃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쳐 사랑을 실천한 것이다.
그러나 당시 조선교구장이었던 뮈텔 주교는 천주교 신자의 독립 운동을 금지하고 있었다." 이런 까닭에 안중근 의사는 살인자로 매도되어 성사도 받지 못했고, 빌렘 신부와 면회하는 일도 방해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중근 의사는 사형되기 전 자신의 장남인 분도를 사제로 만들어 달라는 유언을 남길 만큼 신앙심이 돈독했다. 뮈텔 주교는 안중근 의사를 외면했지만, 안중근 의사는 자신의 신앙으로 그것을 넘어선 것이다. 안중근 의사는 그동안 한국 교회사에서 외면받아 왔다. 그가 가톨릭 신자로 복권된 것도 서거100주기인 2010년에 와서야 이루어진 일이다. 

조선을 넘어 동양 평화를 향해
우리는 안중근 의사의 삶과 그가 쓴 〈동양 평 화론〉에서 그가 역사와 민족 앞에 밝힌 신앙 고백과 민족애, 그리고 세계 평화에 대한 뚜렷한 신념을 읽을 수 있다. 안중근 의사는 예언자적 통찰을 지니고 있었고, 민중과 민족을 사랑하는 깊은 신앙심과 민족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신앙심과 민족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교회 지도자들이 역사성 없는 신앙의식 을 보이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안중근 의사는 자신부터 먼저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삶을 살았 다. 그는 교육 운동과 국채 보상 운동과 같은 계 몽 운동에 나섰고, 이는 더 나아가 의병 활동까지 이어졌다. 그의 신앙은 단지 성당 울타리에 한 정되어 있지 않았다. 그는 언제나 역사 현장과 마 주하였다. 또한 민중과 민족에 대한 사랑을 실천 하여 자신의 신앙을 증거했다. 이는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모범적으로 실천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안중근 의사는 평신도 사도직의 의미를 새롭게 열어젖힌 선구자라고도 볼 수 있다.
안중근 의사의 이러한 신앙은 오늘 우리 민족 의 얼과 정신, 그리고 민족의 앞길을 밝혀 주는 모범이다. 우리는 안중근 의사에게서 우리가 나아갈 길을 찾을 수 있다. 민족 통일과 민주화, 인간화와 복음화에 이르는 길을 찾을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안중근 의사는 시대의 징표를 밝혀주는 횃불과도 같은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척결한 문제 도 단지 살인이라는 행위 자체로만 파악해서는 안 된다. 이는 성경 • 신학적으로 접근해야 한다. 구약 성경에서 다윗은 적장 골리앗을 살해했다. 그러나 성경은 그를 성왕이라고 전한다. 모세도 동족을 학대하는 감독관을 살해했다. 그러나 그는 민족 파스카의 지도자로서 구약의 중추적인 인물이 된다. 독일 신학자인 본회퍼 목사는 신앙과 행동이 일치하는 삶을 살았다. 그래서 그는 나치 정권에 맞서 신앙인으로서 목소리를 높였고, 결국 히틀러 암살을 계획했다는 죄로 1945년에 교수형을 당했다. 이런 그의 삶은 교회의 역할과 세상 속에 사는 그리스도인들의 책임을 일깨워 준다. 본회퍼는 감옥에서 동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만일 어떤 미친 운전자가 사람들이 많이 다니 는 이도 위로 차를 몰아 질주한다면 목사인 제 임무는 여생자들의 장례나 치러 주고 가족들을 위로하는 일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는 그 자동차에 올라타서 그 미친 운전자로부 터 핸들을 빼앗아야 할 것입니다."
2015년 5월에 시복된 엘살바도르의 오스카 로메로 대주교는 독재 정권이 사람들을 살해하며 민주화 운동을 탄압하자 이에 저항했다. 그리고 1980년 3월 24일 저녁 미사를 거행하던 중 성당에서 군부 독재 정권이 고용한 암살자에게 살해 당했다. 그는 살해되기 전날 라디오 방송에서 이 렇게 말했다. "하느님의 이름으로, 아울러 날마다 더한 고통을 받아 그 부르짖음이 하늘에 닿은 민중의 이름으로, 나는 그대들에게 부탁하고 요구하고 명령 합니다. 탄압을 중지하시오!" 또 그는 미사 강론 중에 신자들에게 이렇게 말 하기도 했다. "무죄한 사람들을 학살하라는 명령에 대해서 '하느님의 이름'으로 거부합시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한국에서 순교자들의 시복식을 마친 뒤 로마로 돌아가며 로메로 대주교의 시복에 어떠한 교리적 문제도 없다고 밝혔다. 그리고 2015년 2월 3일 교황청 시성성 장관 아마토 추기경과 독대하면서 로메로 대주교의 죽음을 '순교'로 규정하고 그와 관련한 교령 선포를 승인 하였으며, 5월 23일에 시복하였다. 로메로 대주교는 사제로서 백성이 군부 독재 의 착취와 억압으로 고통받는 모습을 보면서 함께 아파했고, 가난한 백성이야말로 하느님의 사람이기에 교회가 선택해야 할 이들임을 분명히 있다. 그래서 그는 목소리 없는 이들의 목소리' 되어 민중의 신음을 대변하였으며, 또한 '평화를 호소하는 자유의 목소리'가 되었다. 로메로 대주교는 동료 사제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선택할 길은 이 길밖에 없습니다. 신부님들은 사랑의 힘을 믿지 못하시는지요? 그들이 나를 죽일 때 나는 엘살바도르 사람들의 가슴에 다시 살아날 것입니다. 제가 흘린 피는 자유의 씨앗이 되고 희망이 곧 실현되리라는 신호가 될 것입니다. 사제는 죽을지라도 하느님의 교회인 민중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가 이렇게 단호하게 말할 수 있었던 것은 이 미 순교를 예감했고 각오했기 때문이다.
안중근 의사는 자신의 행위가 전쟁 중에 독립 군 대장으로서 적군 대장을 물리친 것이라고 말 했다. 비록 전투가 치열한 전쟁터에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안중근 의사는 일제 강점기하에서 신 음하는 우리 민족의 현실을 보며 이것이 바로 전 쟁터라고 생각했고, 우리 민족을 구하기 위해 앞 장선 것이다. 따라서 안중근 의사 역시 우리 선조 순교자의 영성을 이어 죽음으로 민족애를 실천 한 사랑의 순교자이며, 복음을 증거한 진리의 증거자라고 할 수 있다.

한국 천주교회사가 외면한 두 인물

 

황사영과 안중근 의사, 이 두 순교자는 공통점이 있다. 황사영은 한국의 역사에서 외면받은 사람이고, 안중근 의사는 가톨릭교회에서 외면받은 사람이다. 황사영은 백서를 집필하여 반역죄 로 처형되었으며, 안중근은 조선을 침략한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죄로 한국 천주교회사에서 그림자와 같은 존재가 되었다.
그러나 요즈음에는 '신앙을 위해 민족을 팔아 먹은 매국노 황사영'과 '신앙의 규범을 어기고 민족 사촌과 동양 평화를 위해 살인을 한 안중근'에 대한 재평가 작업이 활발하다. 이 두 순교자는 정치와 종교, 민족과 종교, 신앙과 애국 사이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올바로 서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방향을 제시해 주기 때문이다.
많은 선조 순교자들 가운데서도 특히 황사영과 안중근 의사는 오늘을 사는 한국 그리스도인들에게 새로운 신앙의 방향을 제공한다. 그것은 바로 자발적인 평신도 신앙이다. 그들은 교회 지도자들이 상상도 하지 못할 방법으로 진취적이 고 진보적인 신앙관을 제시했다. 자신을 내던지 는 결단력 있는 신앙을 보여 준 것이다. 그들은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처럼 세상과 타협하려 하지 않았다. 예수님의 길은 백척간두에서 한 걸음 더 내딛을 수 있는 용기와 결단을 전제로 하고 있다. 그때 비로소 길이 열린다는 것이다.
한국 천주교회사에는 위대한 순교자들이 무수히 많다. 시복 시성이 된 선조 순교자들뿐만 아니라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순교자들도 적지 않은 것이다. 이런 분들이 있었기에 성직자 중심으로 출발하지 않은 한국 교회이지만 그리스도 신앙이 한 번도 흔들리지 않았다. 출발하지 않은 한국 교회이지만 그리스도 신앙이 한 번도 흔들리지 않았다.
한국 천주교회에서는 인간을 구원하는 진리에 대한 헌신과 봉건적 신분 질서를 뛰어넘는 해 방에 대한 동경을 바탕으로 신앙생활이 시작되었다. 그것은 골고타 언덕 십자가에 매달려 처참 히 피를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따르고자 하는 바로 그 마음이었다. 초대 교회가 가졌던 그 마음으로 우리 한국 교회가 태동한 것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신자유주의의 탐욕 아래 서 인간성이 상실되고 있다. 이러한 가운데 우리 교회는 앞길을 제대로 비추고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자신은 성직자가 아니라는 대답으로 회피하지 말자. 우리의 선조 순교자들은 예수님의 삶을 따르고자 하는 마음으로 이 대답을 피하 지 않았고, 자신을 헌신하는 길로 나아갔다. 우리는 그 마음을 다시금 되새겨야 한다. 그리고 황사영과 안중근은 바로 이러한 마음을 대표하는 이들이기에 우리 신앙의 나침반과 같은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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