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1강
제 4장 한국의 순교자들 1
앞 장에서는 우리 선조 순교자들이 향주삼덕의 덕행을 실천하는 삶을 살았음을 살펴보았다. 이번 장에서는 그러한 삶을 살았던 우리 선조 순교자들의 신앙이 어떻게 뿌리내리게 되었는지를 살펴보고, 그 가운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순교자인 윤지충, 황사영, 김대건, 안중근에 대해서 간략히 알아보려 한다. 이 네 명의 순교자를 뽑은 이유는 그들이야말로 새 세상을 위한 간절함이 깃든 순교자였기에 우리 순교자들의 영성을 가장 잘 보여 주는 전범典範이 될 수 있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진보적 지식인들의 천주교 수용
임진왜란(1592~1598년)과 병자호란(1636~1637년) 을 겪고 난 조선의 지식인들은 무력한 조선의 현 실을 직시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지금껏 조선 왕조를 지탱하던 주자학이 아니라 다른 학문 과 진리를 추구하기 시작했다. 더구나 자신들이 오랑캐로 깔보던 청나라가 어느덧 명나라를 넘 어 중화 문명이라는 바탕 위에 만주족 고유의 문 화를 발전시키고 있었다. 그리고 서양 문물까지 들여와 조선과는 비교할 수 없는 화려한 문명을 이루었다.
당시 북경을 오가던 사신들과 역관들은 새로 운 사상을 담은 서책과 신식 물건들을 조선으 가져오기 시작했고, 그중 <천주실의天主實義>, <직방외기職方外紀> 등과 같은 천주교서적도 함께 들어 있었다. 특히 박지원이나 박제 가 같은 실학파는 오랑캐들에게는 배울 게 없다는 고정 관념을 깬 진보적 지식인들이었다. 그들 서학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가 차츰 천주교에도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처음에는 천주교를 서학이라는 학문으로 받아들였지만 점차 호감을 가지게 된 것이다. 이를테면 실학파 중 한 사람인 이익은 《천주실의》를 읽으며 그 책에 대한 발문을 썼는가 하면, 홍대용과 박지원은 사절단으로 북경을 방문했을 때 천주당을 찾기도 했다. 그리고 이후에 조선의 진보적 지식인들 중 점차 천주교를 학문을 넘어 하나의 종교로 믿는 사 람이 생기게 되었다.
그중 이벽은 천주교를 신앙으로 받아들인 최초의 인물이다. 그는 마침 북경으로 갈 일이 있던 이승훈을 설득하여 북경에서 기도문과 서적을 얻어 오고 세례를 받도록 당부했다.
1784년 2월경 27세의 청년이었던 이승훈은 북 경의 천주당에서 세례를 받는다. 프랑스 출신 예수회 사제인 그라몽 신부는 이승훈에게 조선 교회의 주춧돌이 되라는 의미로 베드로'라는 세례명을 붙여 주었다. 주위에서는 이승훈이 교리 공부가 부족하다고 만류했지만 그라몽 신부는 단 하나를 물었을 뿐이다
"임금이 당신의 행동이 잘못되었다고 하면서 신앙을 버릴 것을 강요하면 어찌할 것입니까?"
이승훈은 이 물음에 신앙을 버리기보다는 죽음을 택하겠노라고 단호히 대답했다. 조선의 천주교회는 이처럼 첫 세례자부터 이미 순교의 씨앗을 내포하고 있었다. 그래서 조선에 온 선교사들은 조선은 순교자의 나라며, 하늘 문이 활짝 열린 곳'이라고 불렀다.
박해의 시작: 당쟁에 이용당하다
천주교가 서학이라는 하나의 학문으로 이해되 다가 서교라는 종교로 발전하자 박해가 시작되 었다. 특히 당파 싸움에 빠진 세력들은 그들의 이익을 위해 천주교를 이용하기 시작했다. 천주교가 정치적 논리에 휘말리게 된 셈이다.
당시 임금이었던 정조(재위 1776~1800년)는 천주교를 배척하지 않았다. 그가 가장 총애하던 사람 중 하나였던 정약용이 바로 천주교인이었을 정도였다. 그리고 정조 임금 때 영의정이던 채제공도 천주교에 관대했다. 남인의 거두였던 그는 정조의 아버지인 사도세자를 옹호했던 인물이기 에 정조의 신임이 두터웠다. 그리고 그런 채제공의 며느리가 바로 정약용의 누이였다.
그러나 남인이 득세하자 그들을 깎아내리고자 하는 세력은 윤지층의 폐제분주蔽祭焚主 사건을 계기로 유교를 지킨다는 벽사위정僻邪衛政을 내세우며 조상 제사 문제를 주요 쟁점으로 삼았다.
정조는 이 문제를 확대시킬 마음이 없었기에 윤지충 사건의 확산을 막고 사태를 무마하는 선에서 마무리 지었다.
그러나 "정학正學이 밝아지면 사학邪學은 저절로 사라질 것"이라며 천주교를 묵인하던 채제공과 정조가 생을 마감하자 조선은 곧 노론 벽파가 득세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남인 시파와 천주교 인에게 핏빛 역사가 시작되었다.
11세의 나이로 왕위에 오른 순조를 대신해 수 렴청정을 하던 정순왕후와 노론 벽파는 1801년 (순조 원년) 정월 10일 사학을 금하는 교서를 발표 한다. 당시 조선에서 천주교를 박해한 이유는 첫째, 당파 싸움에서 천주교를 빌미로 반대파를 몰아내기 위한 것이고 둘째, 아는 것이 오직 주자학인 이들에게 천주교의 가르침이나 사상은 변괴, 곧 불온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1801년 2월 말 이승훈, 정약종, 최필공, 홍교만, 홍낙민, 최창현 등이 서소문 밖에서 참수되었다. 이 박해를 신유박해라고 하는데, 이 박해로 순교한 교우들은 3백여 명에 달했다. 이후 기해박해(1839년), 병인박해(1866년) 등을 거치 면서 조선의 신앙인들은 가히 인종 청소genocide 에 가까운 살해를 당한다.
윤지충 바오로 복자
신주를 태운 한국 천주교회의 첫 순교자
2014년 8월 16일,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복 자품에 오른 윤지충 바오로(1759~1791년)는 정약 용의 외사촌으로 해남의 명문 양반가의 맏이였 다. 그의 6대조는 조선 시대 문신이자 뛰어난 시조 작가로 널리 알려진 윤선도이며, 그의 증조부는 조선 후기의 문인 화가로 유명한 윤두서다. 총명한 인재였던 그는 1783년 진사 시험에 합격했 다. 그러나 윤지충은 천주교 교리에 심취해 있었 다. 스스로 《천주실의>와 《칠극》 등 교리 서적을 구해 베껴 읽으며 천주교 알기에 매진한 것이다.
그리하여 1787년에는 서울에 와서 내종형인 정약전을 대부로 삼아 이승훈으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그리고 고향에 내려가서 어머니와 동생 윤지헌은 물론, 자신을 찾아오는 이들에게 교리 를 가르치고 세례를 베풀었다. 나중에 함께 순교 하게 되는 이종사촌 권상연 야고보도 그에게 세례를 받은 사람이다
1790년 윤지충은 윤유일이 북경의 구베아 주교로부터 받아 온 사목 서한에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을 금지하는 조항이 있다는 것을 알게된다. 그는 이 가르침에 충실하고자 신주를 불태우고 그 재를 집 뜰에 묻었다. 1791년 음력 5월 그의 어머니가 선종했을 때도 윤지층은 상주로 예의를 갖춰 장사를 지내기는 했지만, 어머니의 위패를 만들지 않았고, 제사도 지내지 않았으며, 음식도 차리지 않았다. 이는 어머니 권씨의 뜻이 기도 했다. 사대부 명문가의 장남이 제사를 폐지 하고 신주를 불태운 폐제분주 사건은 당시 유교 사회에 대해 정면으로 도전하는 행위로 받아들 어졌다. 당시 조선 사회는 <주자가례朱子家禮>에 규정된 예법을 따랐는데, 이 예법의 핵심에 신주 가 있었다. 따라서 신주를 불살라 버리고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는 것은 인정받을 수 없는 천인공 노할 반동 행위였다.
이렇게 천륜을 어긴 죄인에 대한 소문은 결국 조정에까지 알려졌고, 유림은 이를 묵과하지 않 았다. 조정에 이들의 처벌을 원하는 상소문이 올 라왔고 결국 윤지충과 권상연에 대한 체포령이 떨어졌다.
이에 윤지충과 권상연은 충청도 광천과 한산 으로 저마다 피했다가 숙부가 볼모로 잡혀 있다 는 소식을 전해 듣고 진산 관아에 자수한다. 윤지 충을 잡아들인 진산 군수는 그를 협박하며 회유 하려 애썼지만, 그는 오히려 천주교 교리의 정당 성을 역설하며 자신의 신앙을 증거하였다. 더 이 상 윤지충의 신념을 굽히기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된 진산 군수는 권상연과 함께 윤지층을 전주 감 영으로 이송했다. 그들은 여기서 혹독한 고문을 받으며 배교를 강요받았다. 그러나 그들은 조금도 굴하지 않았다. 또한 교회나 교우들에게 해가 되는 말은 결코 입 밖에 꺼내지 않았다.
오히려 윤지충은 천주교 교리를 설명하면서 제사의 불합리함을 조목조목 지적하였기에, 전라 감사가 화가 나서 더욱 혹독한 형벌을 명령할 정도였다. 전라 감사가 신주를 모시지 않고 제사 를 지내지 않는 일은 짐승보다 못한 짓이며, 국 가에 대항하는 역모와도 같다고 했을 때, 윤지층과 권상연은 그들의 신앙이 당시 조선이라는 국가와 양립할 수 없음을 알았다. 윤지충은 문초를 하던 감사에게 교리서를 읽어 주며 "천주가 모든 사람의 아버지이며 천지와 인간, 만물의 조물주" 이기에, "사람의 살과 피는 부모에게서 받았으나 사실 이것을 주는 이는 천주"라면서 "충성의 뿌 리도, 효도의 뿌리도 다 천주의 명령"이라고 답 했다. 그리고 죽음을 각오한 채, "천주를 큰 부모로 삼았으니, 천주의 명을 따르지 않는다면 이는 결코 그분을 흠숭하는 뜻이 될 수 없습니다."라 면서 고문에 응하였다.
당시 전라 감사가 조정에 올린 보고서에는 다 음과 같은 내용이 들어 있다. "형문을 당할 때, 하 나하나 따지는 과정에서 피를 흘리고 살이 터지 면서도 찡그리거나 신음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 았고, 말끝마다 천주의 가르침이라고 하였습니 다. 그리고 심지어는 임금의 명을 어기고 부모의 명을 어길 수는 있어도, 천주의 가르침은 비록 사 형의 벌을 받는다 하더라도 결코 바꿀 수 없다고 하였으니, 확실히 칼날을 받고 죽는 것을 영광으 로여기는 뜻이 있었습니다."
정조는 윤지중과 권상연을 극형에 처할 생각 이 없었다. 그러나 이미 반대파의 상소가 30건 이 상 올라왔고, 이를 빌미로 노론 벽파가 뭉쳐 남인 을 공격하기 시작했기에, 채제공마저도 청조에 게 사형을 건의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정조는 을 지층과 권상연을 참수한 뒤 5일간 현수하고 사학인 천주교를 철저히 엄계하라는 훈령을 내렸다.
형은 즉시 집행되었다. 그러나 윤지충과 권상 연은 형장으로 끌려가는 길에도 마치 잔치에 가 는 사람들처럼 즐거운 얼굴로 예수 마리아"를 외치며 따라오는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교리를 전했다고 한다. 1791년 12월 8일(음 11월 13일) 전 주 풍남문 밖 형장에서 윤지충과 권상연이 참수 를 당했을 때 윤지충의 나이는 33세였고, 권상연은 41세였다. 이렇게 하여 윤지충은 한국 천주교회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다.
샤를르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에 따르면, 오고 가는 사람들의 경각심을 일깨우기 위해서, 그들의 시신은 9일간이나 그 자리에 방치되었는데, 이 시신들은 조금도 썩지 않았다. 그리고 이들을 고문했던 형구에 묻은 피도 방금 전에 흘린 것처 럼 선명했다. 교우들은 손수건 여러 장에 순교자의 피를 적셨으며, 그중 몇 조각을 구베아 주교에 게 보내기도 하였다. 당시 죽어 가던 사람들 가운 데 몇몇은 이 손수건을 만지고 병이 낫기도 했다.
윤지충과 권상연이 순교한 지 4년 후, 주문모 신부는 풍남문 앞을 지나면서 "성교를 공부하여 성인품에 이르게 된다면, 마땅히 두 사람의 무덤 위에 천주당을 세워야 할 것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그리고 이 말대로 120여 년이 흐른 뒤 바로 그 자리에 아름다운 전동 성당이 들어섰다.
나는 무엇을 태워 버릴 수 있는가
윤지충의 폐제분주 사건은 당시 조선 사회에 충격적인 일이었다. 그러나 오늘날에 와서는 몇가지 점을 되새길 만하다. 첫 번째로 주목할 점은 윤지충의 폐제분주 사건으로 신흥 세력과 노론 벽파를 중심으로 한 당파 세력이 충돌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윤지충은 천주교를 접하고, 거기서 새로운 신앙을 얻었다. 그래서 그는 하느님께서 천지만물의 주인이라고 고백하고 제사를 금지하는 명을 따른 것이다. 순교자들은 구체제를 넘어 하늘 아래 모두가 형제자매인 평등 세상을 꿈꿨다. 그리고 임금보다 하늘과 땅의 주인이 내리는 명을 따르려 했다. 그러나 이것이 국가에 대한 충성과 부모에 대한 효도를 거부하는 것은 아니었다. 천주의 명이 충성과 효도의 뿌리이기에 더욱 중시한 것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론 벽파는 이런 그를 극형에 처하라고 계속 상소를 올렸다. 그들에게는 윤지충의 불효도 중요했짐나 사실 더 중요한 목표가 있었다. 그것은 윤지충의 신념을 핑계로 자신들의 정적을 제거하고자 한 것이었다. 이렇게 당쟁에 이용하기 위해서 그들은 윤지충의 신주 소각 사건을 체제를 흔드는 반사회적 패륜 행위이자 반역 행위로 부각시켰다. 그러나 하느님의 명에 충실하고자 했던 천주교인들은 박해자들과는 달리 세상의 힘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래서 이후 박해가 일어날 때면 산속으로 피신하여 신앙을 지키거나, 전교를 하다 발각되면 순순히 순교를 받아들이며 신앙을 증거할 수밖에 없었다.
두 번째로 주목할 점은 윤지충이 바로 지배 계급 지식인이라는 점이다. 한국 천주교회가 선교사 없이 자생적으로 퍼지게 된 것도 놀라운 일이지만, 그 천주교를 받아들인 지배 계층 지식인인 윤지충이 과감히 지배 이념에 반기를 들고 신주를 불태우면서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다는 사실 또한 상당히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다는 것,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 곧 하느님 나라의 백성으로 산다는 것은 자신에게 너무도 익숙한 것들과 단절함을 의미한다. 이렇게 자신의 신앙을 확인하는 그 일이 윤지충에게는 폐제분주였다. 물론 오늘날에는 제사를 금지하는 일에 대해 당시와 다르게 가르친다. 교회는 더 이상 조상 제사를 우상 숭배나 미신이 아니라 가족 공동체의 화목과 유대를 이루는 사회, 문화적 풍속이라고 이해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윤지충의 행위가 의미 없는 것은 아니다. 그는 또 다른 신앙의 길을 제시한 것이기 때문이다. 서울대 국문학과 정병설 교수는 조선 후기의 순교자를 두고 "예전의 한반도에서는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인간형"이라고 묘사한다. 그렇다면 한국 최초의 순교자 윤지충은 바로 '새로운 인간형의 선구'라 할 수 있다. 그는 당시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을 벌인 인간형이다. 윤지충은 당시의 지배 이데올로기인 유교 사상을 버리고, 신분이 보장된 양반 가문까지 버렸다. 그렇게 하면서 그는 마음 깊은 곳에 내면화된 신주 단지를 불태울 수 있는 용기와 결단을 얻었다. 따라서 그는 오늘을 사는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자기 포기'와 '비움'의 영성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암시한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자기를 버리고 신주를 불사른 신앙의 선조들앞에서 우리는 다시 한 번 신앙을 고백해야 한다. 혹시 윤지충이 불사른 신주가 내 안에 내면화되어 있지 않은지 말이다. 그리고 내 안에 깊숙이 자리하고 있는 나의 신주 단지가 도대체 무엇인지도 성찰해 보아야 한다. 내 안의 왜곡된 가치를 버리지 못하고, 교회의 적폐積弊를 과감히 잘라 내지 못할 때 우리의 신앙은 하느님이 아닌 또 다른 신주를 모시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윤지충의 폐제분주 사건과 순교는 교희의 존재 이유에 대해 상징하는 바가 큰 사건이다. 윤지충은 자신이 가장 소중하게 생각한 신주를 태우며 신앙을 증거했고, 그 후 그가 순교한 자리 위에는 성당이 세워졌다. 한국 천주교회는 이렇듯 자신의 기득권을 과감히 포기할 수 있는 용기와 죽음을 뛰어넘는 증거를 통해서 세워졌다. 오늘날 자본에 대한 탐욕은 세상은 물론 교회 안에도 깊이 스며들어 있다. 그리고 인간성이 상실되어 생명을 우습게 보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이러한 때 과연 우리가 태워야 할 신주는 무엇일까? 과연 무엇을 과감히 버리고 무엇을 새롭게 세워야 할까? 물론 순교자들을 통해 이미 그 답은 제시되었다. 그러나 우리가 과연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어떻게 자신의 삶에서 실천할 것인지는 우리 앞에 여전히 남아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