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강
다. 나의 상처들, 아픔들과 교제 - 상처받은 자들의 신앙생활
어느 영적 서적에 나오는 일화다. 성문 밖 예수님께서 상처 입은 부위에 붕대를 감았다 풀었다가를 반복하면서, 상처받은 자로서 계속 동참하시는 장면이 나온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 ‘내 상처를 만져 보시오!’라는 문장이 내 마음속 깊은 곳에서 솟구쳐 올랐다. 그리고 “당신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살펴보시오. 그리고 당신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시오”라는 말씀이 들려왔다.
‘의심하는 자들의 수호성인’의 무덤에서 아침 미사 중에 읽었던 요한복음의 토마스 사도 이야기가 새롭게 다가왔다. 예수는 모든 작은 이와 고통받는 이를 자신과 동일시했다. 그러므로 상처 입은 모든 이, 세상과 인간의 온갖 고통은 ‘그리스도의 상처’다. 내가 오늘날 이 세상에도 여전히 가득한 그분의 상처를 만질 때만,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고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이라고 부를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무의미하고 헛되이 ‘주님, 주님!’(마태 7,21 참조)을 부르는 것이다. 분명히, 우리 중 누구도 자신을 이 세상의 모든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메시아라고 여기지 않는다.
“그의 상처로 우리는 나았다.”(이사 53.5)
아래로부터의 영성은 나로 하여금 나의 상처들에 대해서도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법으로 접근하도록 한다. 우리들은 예외 없이 어떤 종류든 간에 우리의 삶을 힘들게 했던 상처를 지니고 있다. 어떤 사람은 어린아이였을 때 자신을 방어할 능력이 없는 상태에서 억울하게 두들겨 맞았던 일이 마음의 상처로 남아 있는 경우도 있고, 어떤 사람은 자신이 개진한 의견이 주변의 사람들에게 비웃음거리가 되었던 일이 고통스런 삶의 상처로 남이 있을 수도 있다. 또 어떤 사람은 성희롱을 당했던 일이 깊은 마음의 상처로 남아 고통을 받기도 한다. 이러한 것들은 매우 깊은 상처들이다. 존 브레드스호John Bradshaw는 상처 중에서도 가장 나쁜 것은 영적 상처라고 말한다. 그는 영적 상처란 자신의 가치를 타인들에게 존중받지 못하거나 멸시당하는 경우라고 말한다:
우리가 자립적이지도 못하고 여러 가지 부끄러운 잘못들로 점철된 미성숙한 사람으로 언제나 취급당할 때, 우리는 깊은 영적 상처를 받게 된다. 남녀 할 것 없이 자신의 정체성을 인정받지 못할 때 아래로 몰락하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누구나 다 자신이 유일회적인 존재, 이 세상에 존재할 가치가 충분히 있는 멋진 존재로 인정받기를 원한다(Bradshaw 66).
어떤 사람들은 어린아이였을 때 받은 상처의 방어수단으로 내적으로 마음을 경직시키거나 복수심을 가지기도 했다. 이러한 것은 종종 살아남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취해야 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러한 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데 상당한 지장을 준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입은 상처를 부끄럽게 여겨 압박을 가하기도 한다. 그들은 상처들을 보자기나 다른 어떤 것으로 감싸서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밀폐시킨다. 그럴 경우에 그들은 상처를 감싼 보자기나 그릇이 혹시 약해서 상처들이 밖으로 튀어나오지나 않을까 계속 걱정하게 된다. 어떤 이들은 상처로 마음이 병들기도 한다. 그들은 그 상처들을 돌이켜 생각하면서 또 상처를 받을까 봐 걱정하게 된다. 아래로부터의 영성은 바로 그러한 상처 들 속에서 우리의 영혼 깊숙이 숨어 있는 보물을 찾아내고자 한다. 헨리 뉴원Heny Nouwen은 3년 전에 우리 피정의 집을 축성하는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상처받고 부서지고 한 바로 그 자리, 그 순간이 우리가 우리 자신을 깨뜨리고 하느님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기회이다.
바로 그곳에서 우리의 참된 모습을 만날 수 있도록 우리 자신을 완전히 열어나갈 수 있다. 나의 상처를 통해서 내가 참으로 누구 인가를 알게 된다. 바로 그곳에서 나의 마음을 만날 수 있으며, 좀 더 활동적이 되고, 숨겨진 보물인 나의 참된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상처들은 내가 스스로 덮어쓴 가면들을 부수어 그 안에 있는 참된 모습이 드러나도록 한다. 물론 아래로부터의 영성의 길이 그렇게 쉽고 간단한 것은 아니다. 이 길은 먼저 내가 상처들을 나의 가장. 친한 친구로 받아들이는 것을 전제한다. 이 상처들이 나의 참된 보물로 가는 길을 알려주는 존재로 인정하여 그들과 화해해야 한다. 내가 다친 그곳에서 나는 온전히 나 자신이 될 수 있다. 바로 그곳에서 나의 표면적인 삶 뒤에 깊이 들어 있던 참된 나 자신이 고유한 목소리를 내게 된다.
청원기도는 나의 아픔으로 느끼는 타자의 고통에 대해 하느님과 나누는 대화다. 이 대화에서 나의 일차원적 감정, 소망과 생각들에서 조용히 거리를 두고 복음 말씀과 대면한다. 그러면서 고귀한 기도의 성령 안에서 나는 내가 바꿀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구분하는 법을 배운다. 나의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배우며 적어도 어떻게든 거기에 참여할 수 있다. 기도 안에서 나는 피하지 않고 미루지 않고 잊지 않고 눈을 감아 버리지 않는 용기와 힘을 청한다.
또한 내가 변화시킬 수 없는 사람을 정말로 '놓아주고' 포기하는 것, 즉 겸허히 그리고 현실적으로 나의 한계를 인식하고, 자신이 ‘전능’하다는 망상과 환상을 벗어던지고, 자신의 능력에 대한 과대평가와 과부하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을 배운다. 이를 통해 나는 또한 죄책감, 부당함, 분노, 무능이라는 스스로에게 부과한 감정에서 벗어날 수 있다. 나는 하느님이 아니므로, 내가 많은 과제를 하느님 그리고 그분이 이러한 일들을 위해 찾아낸 이들에게 넘겨야 한다는 사실에 직면할 때 느끼는 걱정과 스트레스에서 벗어날 수 있다. 하느님은 내가 바꿀수 없는 것들을 받아들일 냉정함, 내가 변화시킬 수 있는 일들을 변화시킬 용기 그리고 이것을 분별하는 지혜를 주셨다.
기도는 진정제나 하느님 치마폭에서 흐느껴 우는 시간이 아니다. 기도는 하느님의 대장간이다. 거기서 우리는 복음 말씀으로 녹여져 그분의 도구로 단련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 도구는 그분의 손안에서 자유도 책임도 잃지 않고 어떻게, 어떤 목적으로 사용될지 결정된다.
기도는 천상을 날아다니는 공상 여행이 아니고 우리 소망의 피안으로 날아가는 도피도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주님이 승천하신 날에 천상의 음성이 주님의 제자들에게 “갈릴래아 사람들아, 왜 하늘을 쳐다보며 서 있느냐?”(사도 1,11) 하고 주의를 주었듯이, 우리가 공상에 잠겨 수동적으로 우리 상상, 투사, 공상, 망상 속에서 하늘을 보려 할 때마다 기도는 우리 시선을 지상으로 돌려놓는다. 이와 같은 음성은 우리를 모든 경건한 도피에서 나오게 하고, 땅 위에 단단히 서서 땅에 성실하고 우리가 서 있는 땅은 거룩한 땅(탈출 3,5)임을 가르쳐 준다.
우리는 기도 안에서, 칸트가 말한 “머리 위에는 별이 반짝이는 하늘, 내 안에는 도덕법칙”을 의식하기보다 이 세상은 하느님의 보물이 숨겨진 밭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마태 13,34).
상처 입은 그 장소가 고민하는 작업장이다. 그곳에서 감정의 덧없는 거품이 꺼진 후 아담처럼 변명의 덤불에 숨어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얼굴을 마주 보고 하느님께 대답하려는 의지가 성숙한다.
기도와 묵상은 결국 우리 삶의 상처를 치유하는 장소다.
“내가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눈으로 보고,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어보고, 또한 내 손을 그분의 옆구리에 넣어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요한 20,25) 토마스 사도의 이 말은 불신과 의심의 상징으로 남겨졌다. 그러나 부활한 예수에게 상처를 보여 달라고 하는 용기와 그 상처를 보고 만지는 것이 바로 믿음의 시작이다. 의심의 어두운 밤을 지난 상처 입은 신앙만이 치유하는 힘을 얻는다.
토마시 할리크는 ‘상처 없는 신앙’이 환상임을 증명한다. 예수 자신도 상처 입었다. 십자가 죽음의 고통스러운 밤을 지났다. 예수가 상처받은 모든 이와 자신을 동일시했듯이, 세상의 상처를 만짐으로써 믿음을 증언하는 것이 그리스도교의 핵심이다.
실례를 들어 묵상하자. 한 부인이 세 살배기 어린이였을 때 이유 없이 벌거벗긴 채 어머니로부터 작대기로 심하게 등과 허리 등 몸의 뒷부분을 두들겨 맞은 적이 있었다. 당시 그 소녀는 어머니의 화와 그 폭력을 견디어나가기 위해서 몸을 상당히 뻣뻣하게 긴장한 상태로 있었다. 그로부터 50년이 지난 후에도 그녀는 몸의 뒷부분에 아주 심한 통증을 지니고 있었다. 치료와 상담을 하는 과정에서 그녀는 그 이후에 다가온 자신을 다치게 하는 상황에서 방어자세로 언제나 그때처럼 몸을 뻣뻣하게 경직시켰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그러한 원인을 알게 되었다고 해서 그 통증이 금방 사라지지는 않았다. 그녀가 대화를 통하여 정신치료를 해나가면서 마사지를 비롯한 물리치료를 지속적으로 하고 나서야 비로소 그 통증이 서서히 가라앉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그녀는 그녀의 등뒤에 비로소 정상적인 감각이 생겨나고 좋은 기가 흐르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다시 피어나기 시작했으며, 생기를 되찾아 몹시 기뻐했다. 그러면서 그녀는 등을 비롯한 몸의 뒷부분이 굳어져 있었던 것과 같은 상처가 당시에는 필요했다는 것을 인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더 이상 그러한 자세를 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만약 그녀가 그러한 자세를 계속한다면 등의 통증을 더 증가시킬 뿐이다. 이제 그녀는 어린아이 때의 상처를 새로운 안목으로 바 라볼 수 있을 만큼 충분히 강해졌다. 과거에는 어머니에게 화를 내는 것은 자신이 가진 이상적인 요소에 어긋나기 때문에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었으나 이제는 화를 표출할 수도 있게 되었다.
등의 통증을 치료하는 과정에서, 그녀의 삶에서 가진 상치를 진단하는 과정에서 그녀는 새로운 삶을 얻게 되었다. 그녀는 이제 자신의 과거를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상황에서 그 당시에 받았던 상처들 그리고 좋았던 추억들 등을 모두 이해하고 받아들이며 그것들과 화해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그녀는 이제 그녀의 삶이 다시 정상으로 돌아와서 올바르게 흘러가고 있는 것 을 느끼는 동시에 이 삶에서 참다운 기쁨도 가지면서 삶을 참으로 살아가게 되었다. 이렇게 되기 전까지 그녀의 영적 삶은 그녀가 어린 시절에 받은 상처들에게서 멀리 도망치고자 한 하나의 길고 긴 방황이었다. 그녀는 이제 자신의 상처들로부터 도망치지 않고 정면으로 대면할 수 있게 되었으며, 그 상처들을 영성의 원천으로 인식하면서 사랑해 나갈 수 있게 되었다. 상처는 그녀를 깨어 있게 하며, 더 이상 자신 안에 폐쇄적으로 갇혀 있지 않고, 하느님을 향해 자신을 열어가도록 한다.
주님께서는 나를 먼 옛날 죽은 사람처럼
어두운 곳에 처넣어 두셨구나.
무거운 사슬로 묶어 울 안에 가두셨으니
나 어찌 빠져나갈 수 있겠는가.
아무리 살려달라고 울부짖어도
주께서는 이 간구마저 물리치시고,
도리어 돌담을 쌓아 앞길을 가로막으시는구나.
주께서 곰처럼, 숨어 엎드린 사자처럼
나를 노리시며
앞길에 가시덤불을 우거지게 하여
내 몸을 갈가리 찢게 하시고,
나를 과녁으로 삼아
화살을 메워 쏘시는구나(애가 3,6-12).
그녀는 자신의 아픔을 하느님 앞에서 다 표현한 다음에야 비로소 그 상처로부터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게 되어 치유되고 변화될 수 있다.
삶은 우리를 언제나 다시 실망시킨다. 우리는 자신에 대하여 우리 결점과 실패에 대하여 실망한다. 우리의 직업, 아내와 남편, 가족, 수도원, 본당에 대하여 실망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실망에 대하여 자포자기하는 자세로 반응을 보인다. 그들은 그러한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살아간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속에서는 생동감이 식어가고 희망이 사라져간다. 삶에 대 한 꿈들이 서서히 무너져가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실망도 나를 보물이 있는 곳으로 인도해 갈 수 있다. 그 실망은 내가 나에 대하여 그리고 미래에 대하여 설정해 둔 환상으로부터 깨어나게 하려고 의도하는지도 모를 일이다. 내가 모든 것을 분홍색 안경을 끼고 바라보았는지도 모르며, 실망은 나에게서 이러한 색안경을 벗겨버리고 나의 삶의 참 모습을 나에게 보여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실망은 내가 지금까지 그 속에 빠져들어 안주하고 있던 환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그것을 치워버린다. 실망은 내가 스스로 그려온 자신에 대한 그림이 옳은 것이 아니며, 나 자신에 대하여 과장되게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므로 실망은 하느님께서 본래 나에게 만들어주신 나의 참된 모습을 알아내는 좋은 기회이다. 물론 실망은 처음에는 커다란 고통을 안겨주는 것이다. 그러나 그 아픔 을 겪어나가면서 나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그 현실에 맞추어 살아가는 것을 배우게 된다:
상처 입은 조개는 피가 흐르는 그 상처에서 진주를 키워낸다. 그 조개는 자신이 겪은 아픔을 보석으로 변화시키는 것이다(Richurd Shanon, in Müller 86).
나의 상처들 안에서 진주들이 자라난다. 그러나 진주들은 내가 상처들과 화해할 경우에만 자라날 수 있는 것이다. 만약 내가 상처들을 완전히 폐쇄하기 위해서 이를 악문다면, 그 속에서는 아무것도 자랄 수 없다. 나의 상처들과 접촉하는 것이 종종 아픔을 가져온다. 그 아픔을 내 스스로 지워낼 수는 없는 무능함을 느끼게 된다. 그 상처가 비록 아문다고 하더라도 나의 마음속 깊은 곳에 항상 남아 있게 된다. 그러나 만약 내가 상처를 받아들이게 되면, 그 상처는 삶과 사랑의 샘으로 변화되어갈 수 있다. 내가 상처받은 그곳에서 나는 더욱더 생생히 살아 있게 되며, 그곳에서 나 자신과 타인을 좀 더 강하게 느끼게 된다. 그래서 나는 다른 사람이 나의 상처에 접근하는 것을 허용하게 되고, 그것은 만남과 접촉을 가능하게 하여 다른 이들에게도 치유 효과를 가져다준다. 앓아본 경험이 있는 의사만이 다른 사람의 병을 고칠 수 있다고 그리스 사람들은 말한다. 내가 강하게 서 있을 때는 다른 사람이 내 안으로 들어올 수 없게 된다. 내가 상처 입고 약해져 있을 때 하느님이 내 안에 들어오실 수 있고, 다른 사람들도 들어올 수 있다. 그때 나는 하느님께서 본래 만들어놓으신 참된 나 자신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자주 우리의 모든 상처들을 치유할 수 있다는 환상 속에 살고 있다. 그러한 생각 속에 우리는 상처들을 치유하는 데 하느님을 이용할 수 있다. 하느님은 우리 상처를 치유해야만 하 는 존재로 생각하는 것이다. 우리는 치유에 대하여 그 상처들이 아물고 우리가 그 상처들을 더 이상 느끼지 않게 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 상처들이 아물기 전에는 우리는 상처들 주위를 맴돌면서 점점 더 깊이 그 상처 안으로 들어간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가 그러한 상처를 받도록 허용하신 것에 대하여 원망도 한다. 우리가 상처들과 화해할 준비가 되고 나서야 비로소 그 상처는 우리가 내면의 세계로 나아가는 문이 되며. 상처받지 않는 공간, 안전한 공간, 즉 하느님이 거주하고 계시는 공간 안으로 들어가는 문이 된다. 상처는 우리의 안전을 외적인 능력과 강함에서 찾지 말고 우리의 내면에서 찾도록 종용한다. 우리들 모두에게, 어떤 큰 상처를 받은 자에게도 이러한 안전한 공간, 하느님만이 들어가실 수 있는 절대적인 공간이 존재하고 있다. 우리는 바로 우리의 상처 한가운데에서 치유하시는 하느님이 우리 안에 계시는 것을 체험할 수 있다.
(참조: 안셀름 그륀, 아래로부터의 영성, 108-116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