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강
나. 나의 질병들과의 대화 - 질병 중에 신앙생활
아래로부터의 영성은 질병을 대하는 방법에 대해서도 하나의 새로운 길을 제시한다. 우리의 무의식 세계 안에는 우리가 한 번도 아프지 않고 건강하게 살고자 하는 원의가 들어 있다. 우리는 길 병에 걸리는 것을 삶이 아래로 몰락해 가는 것으로 느낀다. 우리는 이 세상의 사물들 위에 존재하고 있지 않다. 우리는 바이러스 침입을 받아 시달리기도 하는 존재이다. 병균이 침입하면 육체는 긴장하여 그것에 반용을 보이고 어려움을 겪게 된다. 그러한 상황에서 우리는 불편함을 느끼고 짜증을 내며, 건강을 되찾기 위해 약과 좋은 음식을 먹고, 운동도 하게 된다. 삶을 규칙적으로 건전한 방법으로 살아가는 것은 건강을 유지해 나가는 매우 좋은 방법이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자신을 한 번도 아프지 않게 보장할 수 있는 삶의 방법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한 번 더 완벽주의를 추구하는 이상적 요소를 설정하는 것이 된다.
질병은 종종 우리 안의 보물을 발견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된다. 만약 우리가 전혀 아프지 않고 건강하게만 살아간다면, 우리는 삶을 표면에서 건성으로 살아가게 될 것이고 우리의 본질에 접근하지 못하고 지나쳐버리고 말 것이다. 우리는 본성적으로는 하느님께 대하여 민감하게 반응하고 관심을 가지는 존재가 아니며, 또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본래 원하시는 삶을 자연적으로 충실히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다. 그래서 질병은 우리를 참된 삶으로 인도하여 우리 안에 들어 있는 보물을 발견하기를 원하시는 하느님의 부르심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질병이 우리에게 무엇을 알려주고자 하는지 전혀 모를 때가 있다. 그러나 질병은 우리가 바로 이러한 무의미 속에서, 잃어버린 건강에 대한 슬픔 속에 서, 아픔과 고통의 어둠 속에서 하느님을 향해 자신을 깨뜨리고 열어놓도록 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모든 종류의 다른 시도들을 그만두고, 우리 자신 안에 깊이 들어올 수 있으며, 하느님께 우리를 완전히 내어드릴 수 있게 된다.”
여기서 우리가 질병들과 어떻게 대화를 해나갈 수 있으며, 하느님께서 어떻게 질병을 통하여 우리를 보물이 있는 곳으로 안내해 가시는가에 대한 몇 가지 예를 들고자 한다. 질병은 우리 안 이 새로운 가능성들을 발견할 수 있는 하나의 기회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질병은 우리가 자신에 대하여 실망하도록 할 수 있으며, 우리를 무능하게도, 질병이 부과하는 엄청난 고통을 지고 가게 할 수도 있다. 자주 우리는 다가온 질병 안에서 아무런 의미도 발견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우리는 질병이 우리에게 무엇을 알려주고자 하는지 전혀 모를 때가 있다. 그러나 질병은 우리가 바로 이러한 무의미 속에서, 잃어버린 건강에 대한 슬픔 속에 서, 아픔과 고통의 어둠 속에서 하느님을 향해 자신을 깨뜨리고 열어놓도록 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모든 종류의 다른 시도들을 그만두고, 우리 자신 안에 깊이 들어올 수 있으며, 하느님께 우리를 완전히 내어드릴 수 있게 된다.
나이가 많은 사제들 중에는 자신들이 미사를 드리다가 혹시 건강상의 문제로 중심을 잃고 쓰러지는 일이 발생하거나 다른 어떤 종류의 어려움이 생겨나지나 않을까 걱정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러한 걱정은 바로 성찬례를 거행하는 중요한 순간에 더욱더 많이 생겨난다. 이러한 걱정에 사로잡힌 사제들 중 더러는 제단을 꽉 움켜잡고 버티거나 식은땀을 흘리기도 한다. 그리고 이들 중 대부분은 그들에게 문제가 생겼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러한 어려움들에서 벗어나기 위해 이 의사, 저 의사들을 찾아다닌다. 그런데 의사들을 찾아다니는 것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내가 왜 이렇게 걱정이 많을까?, 어떤 경우에 내가 어지러움을 느끼게 될까?”를 알아보는 것이다.
그런데 걱정하는 것은 윤리적인 문제가 아니다. 그 누구도 걱정하고 싶어서 하는 것은 아니다. 걱정은 그 사람 안에 자신이 이상적으로 그려놓은 표상과 현실의 실제 상황과의 차이에서 오는 갈등에서 유래한다. 이러한 걱정이 생겨나는 원인 중에 가장 큰 것은 위로부터의 영성이 여기에 강하게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상적인 표상이 너무나 높아서 그는 걱정을 하게 되는 것이다. 사제들 중에는 거룩한 성체 변화의 순간에 자신도 모르게 고전적인 사제상을 자신 안에 강하게 부각시켜서 사제는 현세의 것을 천상의 것으로 변화시키는 존재이며, 신적인 것을 접하는 존재라는 생각, 이외에도 여러 가지 이와 비슷한 생각들에 집착하게 된다. 그리고 동시에 그는 그 자신이 자신의 존재 자체 안에 있는 성적 활력과 공격성이 불러일으키는 어려움들을 비롯하여 여러 가지 잘못들과 연약함에 시달리고 있는 인간이란 사실을 감지한다. 그는 자신 안에 함께 놓여 있는 이러한 두 모습을 잘 조화시켜 나가지 못한다. 그래서 그의 육체도 그 자신의 조화를 잘 이루지 못하고 있는 정신세계에 같은 반응을 일으킨다. 이러한 불일치는 그에게 큰 불편을 주어서 그가 그것을 도저히 간과할 수 없도록 한다. 그는 이를 악물고 자신을 통제해 보려고 노력하지만, 그러한 노력은 그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그는 먼저 실상을 있는 그대로 보고 인정해야 한다. 만약 내가 내 안의 걱정과 대화를 시도해 본다면, 그 걱정은 나로 하여금 내 안에 존재하는 분열에 관심을 갖게 한다. 그 걱정은 나에게 이러한 양면성을 함께 고찰하도록 교육시키며 잘못들과 유약함으로 점철된 나의 인간성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하느님께서 나의 이러한 모습들을 다 아시면서도 나에게 사제 직무를 맡기셨듯이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을 배우도록 한다. 이러한 것은 내가 자신을 인간 위에 두지 않도록 주의시키며 이상적인 사제상에 자신을 고착시키지 않도록 한다. 그 걱정은 나를 세속적인 안목으로 설정되어 나를 경직시키는 이상적인 사제 상에서 해방시켜 그리스도교적 사제직의 신비로 나아가게 한다. 이에 대하여 히브리인들에게 보낸 사도 바울로의 서간에서는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우리의 대제관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는 분이 아닙니다. 그분은 죄 외에는 모든 일에 우리와 마찬가지로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 모든 대제관은 사람들 가운데서 뽑혀 사람들을 위하여 하느님께 관한 일을 맡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가 예물과 속죄의 제사를 바치기 위함입니다(히브 4,15; 5,1).
물론 그 걱정과 대화를 이끌어간다고 걱정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걱정이 내가 어떠한 상황에 놓여 있는지 좀 더 잘 이해하도록 할 수는 있을 것이다.
두통은 우리가 일을 해나가는 데 상당한 지장을 준다. 그래서 우리는 두통에서 가능한 한 빨리 벗어나기를 원한다. 그럴 때 우리는 두통이 알려주고자 하는 메시지를 그냥 놓치게 된다. 일반적으로 두통은 우리가 자신에게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한다든지 너무 많은 일 속에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하나의 표지이다. 그리고 때로는 우리가 속해 있는 공동체에서 편안함을 느끼지 못하고 있음을 알려주는 표지이기도 하다. 만약 우리가 두통을 약으로 없애려고 한다면, 두통이 우리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중요한 의미를 알 기회를 놓치게 된다.
“한 질병의 증세가 이미 그 질병을 치유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 증세는 우리가 무엇에 대하여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지 말해준다.”
두통은 육체가 우리로 하여금 좀 쉬도록 신호를 보내는 것이다. 그렇지 않을 경우에 우리는 계속해서 무리하게 일을 해나갈 것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능력의 범위를 넘어 무리하게 되면, 두통이 그것을 알려주는 것이다. 우리는 육체가 그렇게 강한 반응을 보이는 것을 감사하게 생각해야 한다. 육체는 우리가 지나치게 활동하여 우리의 보물로 들어가는 길을 막을 경우에 언제나 짖어대는 충실한 동반자이다. 우리는 육체가 나의 의지에 복종하도록 하기 위하여 성급하게 약을 사용하는 것처럼 육체를 위에서 아래로 고압적으로 다루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육체가 우리에게 말하려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듣도록 섬세한 관심으로 배려해야 한다.
하느님께서 직접 나의 질병을 통하여 나의 참모습을 알려주신다. 하느님께 나아가는 길에서 나는 나의 질병을 간과할 수 없는 것이다. 나는 오히려 나의 질병을 관통하여 영혼과 육체의 참되고도 깊은 구원을 가져오실 수 있는 분이신 하느님께로 손을 뻗칠 수 있다. 내가 아픈 바로 그곳에 나의 보물도 놓여 있다. 나의 질병을 약으로 퇴치하기 이전에 먼저 나는 그 질병과 대화를 가지도록 노력해야 한다. 아마도 질병은 우리에게 자신을 잘 다루지 못하고 있음을 알려주고 있을지도 모르며, 우리가 자신의 직무에 충실하지 않았거나, 우리 안에 살아 계신 하느님의 모상에 반대되는 삶을 살아가고 있음을 알려주고자 하는지도 모른다.
질병과 화해를 하면, 질병은 우리가 지금까지 소홀히 한 영역과 가능성들에게 안내해 줄 것이다. 질병은 우리 안에 존재하는 야생 개로서 우리가 그 질병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귀담아듣고 함께 보물이 있는 곳을 찾아 나가기까지 짖어대는 것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모든 질병에서 해방되는 것이 중요한 관건은 아니다. 때로는 자신들이 지닌 본질에 따라 살아가도록 우리에게 지속적으로 충고를 해주는 존재가 필요하다.
심리학적인 지식으로는 결코 떼어낼 수 없는 알레르기가 그러한 충고자의 역할을 수행하는 존재가 될 수도 있다. 알레르기는 우리가 자신을 잘 돌보아야 한다는 것을 알려주는 역할을 수행할 수 있고, 또한 우리의 원의를 채워나가는 작업에서도 서두르거나 과욕을 부려서는 안 되며 부드럽고 조심스럽게 해나가야 한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존재일 수도 있다. 알레르기는 나의 삶을 잘 계획하여 무리하지 않고 합리적으로 살아가도록 압력을 가할 수 있으며, 남이 이끌어 가는 대로 살기보다는 적극적으로 살아가도록 나의 마음을 자극하는 존재일 수도 있다. 기침은 기침을 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다른 사람이 기대하는 것을 채워나가기 위해 무리하게 살아가지 말고 자신의 느낌에 섬세히 배려하면서 자신의 삶에 충실해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게 하는 것일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한 질병의 증세에 대하여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 한 질병의 증세가 이미 그 질병을 치유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 증세는 우리가 무엇에 대하여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지 말해준다.
그러나 우리는 자신들의 모든 질병과 대화함으로써 숨겨진 보물을 발견하도록 안내하는 존재로 변화될 수 없음을 인식해야 한다. 우리에게 다가온 질병이 드러내고자 하는 의미를 종종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경우도, 견디기 힘든 고통만 따르는 질병도 자주 있는 것이다. 가끔 우리가 다가온 질병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충분히 질문해 보아도 아무 대답도 들을 수 없는 경우가 많다. 영혼의 상태를 알려주는 질병도 있지만, 그것을 통해서는 어떠한 의미도, 영혼과 심리 상태에 대하여 어떠한 것도 알아낼 수 없는 외부에서 운명적으로 다가와 우리를 괴롭히는 질병도 있다.
그럴 때 우리가 취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 질병과 화해하면서 그 속에서 하느님께 우리를 전적으로 내어드리는 것이다. 그 질병은 우리가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서 손에 든 무기들을 내려놓고 하느님께 완전히 항복하도록 압박한다. 질병 속에서 하느님께 자신을 완전히 내맡기는 것이 그렇게 수월한 것은 아니다. 그래서 만약 우리가 좀 더 올바르게 살았더라면 그러한 질병에 걸리지 않았을 것이라면서 우리를 좀 더 현명하게 진보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삼고 있는 것으로 스스로를 내세우는 위로부터의 영성을 자주 받들게 된다. 이러한 생각 안에는 우리가 마치 그 질병을 잘 극복할 수도 있다는 야심이 들어 있다. 그러고는 우리가 다가온 질병의 원인이 되는 잘못을 스스로 만들었다는 감정을 자주 갖게 된다.
이러한 때에는 이렇게 생각하는 원인들을 찾아야 하며. 모든 죄의식을 떨쳐버리고, 자신을 완전히 하느님께 맡겨드려야 한다. 하느님은 자주 생각지도 않은 방법으로 완전히 다르게 우리를 인도하신다. 질병 속에서 우리는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하느님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그럴 때 우리는 하느님과 자신에 대한 모든 표상들을 완전히 버리고 자신을 참된 하느님께 온전히 내맡겨야 한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온전히 다가와서 완벽하게 당신의 것으로 삼기 위해서 우리가 설정한 모든 계획들과 표상들을 인정하지 않고 지워버리시는 것이다.
(참조: 안셀름 그륀, 아래로부터의 영성, 100-107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