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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2강

새출발

5장 새출발

요안은 지도자의 말에 아무 대답도 없이 깊은 침묵에 잠긴다. 그러다가 지도자에게 자기의 괴로웠던 과거를 샅샅이 이야기했다.

현재의 자기의 행동이 과거의 영향과 밀접히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스스로 발견하게 되었다. 자욱한 안개 속에서 점점 밝은 세상으로 나오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근본적인 이유를 발견하면서도 당황해지는 마음 상태를 다음과 같은 말로 표현한다. “일생을 통해서 내 자신이 무엇인지 몰랐습니다. 내가 누구인지 몰랐습니다. 내가 아는 요안이란 사람과 진짜 요안과는 아주 판이하게 다릅니다. 이제 나는 내가 누구인지 더 찾아봐야 되겠습니다.” 요안은 이 안온한 분위기 속에서 지도자의 온순한 목소리와 부드러운 눈길에 용기를 얻어 그토록 말하기를 꺼리던 자기 잘못에 대해서 자세히 이야기하게 되고, 자만, 겉꾸밈, 불평, 불만, 미움, 그리고 갖가지의 비방책 때문에 나타나는 결과들을 고백하게 된다. 그가 발견한 것은 일생을 통해서 자신의 자유로운 의사대로 살아온 것이 아니라, 남의 요구와 조건을 따라서 꼭두각시처럼 살아왔다는 사실이다. 남들이 움직이는 대로 흔들리고, 자기대로의 의지와 신념이 별로 없었다. 이러한 사실들을 깊은 생각에서 발견해낸 요안은, 이윽고 무거운 입을 열어 지도자에게 말한다.

요안: “저는 여러 가지로 거짓이 많았습니다. 저는 진지하게 저 자신을 반성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자신의 참된 자아가 누구인지 몰랐습니다. 남의 생각에 따라 좌우되었습니다. 저는 남의 의지의 노예였습니다. 체면의 노예였습니다. 참으로 지금 생각하니 기가 막힙니다. 이처럼 비참한 상태 속에서 살아온 저를 인간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저의 존재는 보잘것없는 하나의 지푸라기에 불과합니다.” 이제 요안은 그처럼 거짓스러운 생활 태도와 가면을 벗어버리고 자기 나름의 신념대로 살아나갈 것과, 또 끝까지 진실한 자기 자신을 지켜나가기로 결심한다. 한 마디로 단점과 장점을 다 포함한, 있는 그대로의 자신으로 있기를 결심한다.

성 바오로께서 “하느님 백성의 자유”를 자주 강조하셨다.

 

“부패의 노예 지위에서 구원을 받아 하느님의 자녀의 영광스러운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로마서 8,21-22)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속하심은 자유를 위함이니라.”(갈라타서 4,31)

 

이 자유에 포함된 한 가지 매우 중요한 부분은 바로 단점과 장점을 다 포함한,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인식하고 그대로 존재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자기 진짜 자신을 알고 사랑하는 것이다. 크리스챤적 실존주의 철학자들이 가르치는 사상도 여기에 기인하는 것이다.

이해심과 인자한 마음씨를 가진 지도자를 통해서 요안이 자신을 되찾고 빛나는 다이아몬드로 느껴진 이유를 좀 더 깊이 고찰해 보자.

그 지도자가 요안에게 베풀어 준 분위기 안에는 네 가지의 알맹이가 되는 요소가 들어 있음을 우리는 지적할 수 있다.

1. 이해하는 분위기: 요안의 마음 속에 깊이 잠겨 있는 감정과 느낌을 오해없이 알아 주고, 표정과 태도와 말로서 드러내는 것이다.

2. 믿어 주는 분위기: 자발성과 자주성 그리고, 적극성을 가지고 자기의 문제를 자신이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하고 있음을 인정해 주는 것이다.

지도자는 요안을 의심하고 인정해 주기를 꺼리면 꺼릴수록 인격 발전을 저지시키고 퇴보를 조장시킨다는 사실을 잘 안다.

3. 자유스런 분위기: 지도자는 요안이 숨김 없이 무슨 말이나 할 수 있도록(맘놓고 느끼고 생각하는 바를 다 발표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고, 비록 말을 더듬거나 얼버무려 버리거나, 격한 감정을 드러내면서 말할지라도, 감정 표시를 자유롭게 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것이다.

4. 조건 없이 받아들이는 분위기: 요안 안에서 인간으로서의 가치와 존엄성을 보배로운 다이아몬드처럼 귀하게 여기며, 장점과 약점을 겸하여 가진 요안을 받아들이고 약점이 있다는 이유로 공격하거나, 비난하거나, 배척하거나, 억누르거나 하는 일이 없이, 있는 그대로의 요안을 알아 주고 좋아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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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사랑의 분위기는 먼저 사랑하는 것이므로 인간을 자유스럽게 만든다. 사랑의 표본이신 하느님의 사랑을 피조물인 지도자가 본받는 것이다.

 

“우리는 하느님을 사랑하느니 대저

하느님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니라.”(요안 1서 4,19-20)

 

지도자가 베푼 이 사랑이야말로 재기(再起)의 기회를 주는 사랑이다. 절망 속에서 희망을 불러 일으키는 사랑이다. 쓰러진 사람에게 구원을 주는 사랑이다. 인간 안에 사랑을 탄생시키는 것이다. 귀화해서 사랑으로 말미암아 다시 나게 하는 사랑이다.

요안이 자신을 되찾고 새 사람으로 태어나게 해주슨 사랑이다. 성총으로 말미암아 다시 태어나 영생을 얻도록 해 주는 그리스도적인 사랑이요, 이기심이 없는 희생적이고 초성적인 사랑이다. 이런 명언이 있다. “사랑은 본질상 퍼지는 것이다.” 요안이 사랑을 먼저 받음으로 말미암이 그 보답으로 발전하는 것이다. 조건을 모르는 사랑의 따사로운 햇볕 아래서 꽃같이 만발하는 사랑이다.

그러기에 성 벨라도께서는 “사랑은 위대하다. 지극 신성한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을 게다.

전에는, 사람들이 조건 있는 사랑으로 요안을 대하였으므로 그들이 온 인류를 대표하는 것처럼 생각되었다. 반대로, 지금은 조건 없이 사랑하고 이해하는 마음을 가진 그분이 온 인류를 대표하는 것 같이 느껴진다. 다시 말하면 미움과 조건 있는 사랑을 받았을 적에는, 남을 신임하지 못하였음은 물론 심지어 자기 자신까지도 믿지 못하고 의심하였다. 남에게 사랑을 베풀 줄도 모르고 사랑을 받아 줄 줄도 몰랐다.

자기를 과소평가하게 되고, 따라서 열등감에 항상 사로 잡혔었다. 반대로, 조건 없는 사랑을 맛본 지금은 남에게 사랑을 베풀고 남이 주는 사랑을 점점 받아들일 줄도 알게 되고, 자신의 가치와 존엄성을 깨닫게 되어 모든 일에 자신을 가지고 일할 수 있게 되어가는 중이다.

 

“사랑은 위대한 것이요. 극히 좋은 보배이다. 이것만 있으면 모든 짐이 가벼워지고 모든 고르지 아니한 것도 고르게 되어 잘 참게 된다.”(준주성범 제3권 5장)

 

이해하는 마음을 가진 지도자의 사랑의 표현은 요안의 어두운 마음을 거울처럼 반사시켜 요안으로 하여금 인간으로서의 자신의 가치와 인격과 존엄성을 정말 찬란하고 값진 다이아몬드로 자각하게 한다.

우리가 살펴온바 요안의 결점과 나쁜 습관 그리고 무의식적 방비책 등이 한 가지 큰 원인, 즉, 자기혐오에서 생겼다는 사실을 우리는 쉽사리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자기 가치와 존엄성을 인식하게 된 지금의 마음 상태에서는 과연 어떠한가를 살펴보자. 한마디로 말해서, 조건 없는 사랑으로 부분적인 치료가 아닌 보편적인 치료가 되었다. 그 사랑을 받음으로 말미암아 자기 자신을 사랑하게 되고 각가지 방비책이 뜻이 없고 쓸 데 없게 되었다. 예를 몇 가지 들어 보자.

남의 마음을 느끼지 않으니 반발심을 일으킬 이유가 없다.

자기 가치와 존엄성을 깨닫게 되어 열등감에서 생기는 수줍어함과 변명 같은 비굴한 행동이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자기 자신의 사랑스러움을 느끼게 되었으므로 겉꾸밀 필요가 없다. 있는 그대로의 자신이 그냥 좋게 보이므로 이중역할을 하거나 가면을 쓸 리가 없다. 사랑을 거저 받게 되었으니 남다른 행동이나 영웅적 행위를 하려는 분에 넘치는 야망으로 마음 아파할 필요가 없다.

찬란하고 값진 다이아몬드로서의 자신을 발견하였으니 남을 시기할 필요가 없다. 이 여러 가지 사랑의 부족에 기인한 증세가 다 한꺼번에 거품처럼 없어져 버리는 것이 아니고 시간의 흐름에 따라 (조건 없는 사랑을 느끼고, 받아 줌에 따라서) 점차적으로 줄어들게 되는 것이다.

이제 요안은 자기 결점들을 체계적으로 하나 하나씩 캐내 버리는 방법을 쓰기보다 차라리 자기 안에 사랑을 채움으로써 자기 안에 있는 결점들을 사랑의 열로서 저절로 녹여 버리는 방법을 쓰는 것이다.

 

“모든 율법이 사랑 안에 포합된다.”(마태오 22,37-40 참조)

“대저 모든 율법은 『네게 가까운 자를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모이세 3권 19,18)하는 한 가지 계명으로서 완성됨이니라.”(갈라타서 5,14-15)

 

사랑은 그리스도교적 완덕의 정화요 극치다.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덧입을지니, 사랑은 완덕을 매는 끈이니라.”(콜로새 3,14)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먼저 하느님을 사랑하라, 그리한 후에 네가 원하는 바를 하라.”

뿌리 깊이 박힌 듯한 결점들을 짧은 시간에 완전히 캐 버릴 수는 없는 것이고 일생을 통해서까지도 없애 버리지 못하는 결점들도 있을 것이니 사랑의 정신으로 참아 견디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사랑을 실천하기는 정말 어렵다. 요안은 실생활에 사랑의 원리를 응용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무척 많은 인내심이 요구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나, 사랑의 길로 나가면 나갈수록 그 비례대로 결점은 줄어들기 마련이다.

 

자혜(慈惠)의 희생이란 억지가 아니라,

하늘에서 내리는 가는 비처럼

아래로 떨어지며 축복(祝福)이 겹쳐집니다.

주는 이와 받는 이를 축복하니까…

자혜가 공정(公正)을 누그럽힐 때

인권(人權)이 신권(神權)처럼 보입니다.

(오경웅 박사)

 

이제 우리는 요안의 마음을 이렇듯 움직여 놓은 지도자의 비결을 좀 더 살펴보자.

“사랑”이신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계명을 준수하는 이들이 실천하고 또 실천하고자 노력하는 바를 그는 이행하였을 뿐이다. 성 프란치스코·살레지오의 말씀이 이 지도자의 비결을 대신해서 말해줄 것이다. “나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차별을 두지 않는다. 모든 사람에게서 구세주의 모습을 보기 때문이다.”

지도자가 직접 요안을 개조시킨 것이 아니다. 그의 성격을 고치어 다시 만든 것도 아니고, 그의 마음을 바로잡은 것도 아니다. 다만 요안의 마음에 사랑을 받을 수 있는 능력을 불어 넣어준 것이다. 요안이 그 지도자에게서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서도 사랑을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의 준비를 예비시켜 주었을 뿐이다. 상통할 수 있는 힘과 자기 스스로 자기의 성격을 자발적으로 고쳐 나가도록 자극시켰을 따름이다. 한 마디로, 사랑의 위대한 힘을 보여준 것이다.

바야흐로 사랑을 막는 방비책의 담이 무너지려 한다. 인간의 사랑이 흘러들어 오도록 닫혔던 마음의 문이 열려지려 한다. 거리낌 없이 주저함 없이 남의 사랑을 받아들일 수 있고, 자기의 사랑을 남에게 쏟아 줄 수 있는 마음의 자세를 갖추려 한다. 이제는 사랑을 받는 데 있어서나, 주는 데 있어서 장애를 넘어뜨릴 힘이 생겨 나는 것이다. 이제 막 사랑을 저해하는 방비책의 담이 무너지려는 시점에까지 다다른 것이다.

고독에 지쳤던 요안이 이제는 자기도 친구를 사귈 수 있다는 자신을 갖게 되었다. 사교할 줄도 알게 되었다. 우정이 무엇인지를 이제야 알 것만 같다.

진정한 우정은 받기만 하는 것도, 주기만 하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사랑은 사랑함으로써 배울 것이다.”(성 프란치스코·살레지오)

요안은 남이 미쳐 밝혀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한 것을 깨우쳐 주신 성 바오로 사도의 사랑에 대한 고원한 이상인 다음 말씀이 비로소 이해될 것만 같은 느낌이다.

“상호간(相互間)의 사랑 외에는 아무에게도 무슨 책무를 지지 말지어다. 대저 가까운 자를 사랑하는 자는 법을 준행하는 자니라. 대저 『사음을 행치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을 말라, 망녕된 증참을 말라. 탐하지 말라』등의 계명은 다른 모든 계명과 같이 『남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하는 이 한마디에 총괄(總括) 되었나니라.” 지금까지 요안은 이 책의 주인공이 되어 왔다. 도대체 요안이란 누굴까? 요안은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들을 뜻한다. 결점이 없고 죄가 없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누구나 본죄가 있고, 또 미움과 조건 있는 사랑을 받는 때문에 여러 가지 방비책이 무의식 중에 생겨나기 마련이다. 원죄로 인하여 인간이 근본적으로 부패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원죄로 말미암아 모 든 인간은 다 나약성을 지니고 있으며, 죄에 빠질 경향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요안과 같이 인간 그 자체로 보아 찬란하고 값진 다이아몬드임에는 틀림이 없다. 대인관계로 인하여 예수님의 사랑을 받고, 그 성총을 통해서 모든 이가 다 어린아이로 귀화하여 다시 날 수 있는 것이다.

다행하게도, 사람은 누구나 본성적으로 선을 행하고 악을 피하려는 경향이 있다.

이제까지 요안은 자기의 가치와 존엄성을 깨닫지 못하고 의미 없는 삶을 영위해 왔다. 그는 자신이 없었기 때문에 늘 무기력하였고, 자기혐오 때문에 늘 남을 시기하고 미워하고 원망하였다. 이러한 감정이 떠나는 날이 없었던 것이다.

자기를 증오하던 감정은 타인에게 옮겨 갔고, 자기를 원망하던 감정은 마침내 남을 원망하는 감정에 휩싸이게 되었다. 자기 불행이 자기 때문이라기보다 타인으로 말미암은 것인 양 늘 남을 헐뜯고 비방하였었다.

그러나, 자기 자신을 더 잘 깨닫게 된 지금은 남에게 보다도 자기 자신에게도 책임과 탓이 있음을 절실히 느끼게 되었다.

말할 것도 없이 인격 발전에 가장 큰 지장을 끼쳤던 한 가지 큰 원인은 조건 없는 순수한 사랑을 별로 받아 보지 못한 때문이었다.

부모와 윗사람들에게 받아온 조건 있는 사랑에 모든 탓을 돌린다면 지나친 과장일까…? “조건 없는 사랑”을 별로 느껴 보지 못한 때문에 원만한 인격을 갖추지 못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들도 나와 마찬가지로 어린 시절에 윗사람들로부터 같은 영향을 받지는 않았는지?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게 되니, 그들에게 모든 탓이 있다고 원망하기보다 차라리 그들을 동정하는 마음이 솟아오르려 한다.

요안은 자신을 뉘우치며 새로운 결심을 한다. “늦은 감은 있지만, 이제라도 새 출발을 해 보자. 좀 더 이해하고 또 순종해 보자. 나의 자녀들에게 다시는 이런 영향을 물려 주어서는 안 되겠다”고.

새로운 결심을 세우고, 또 인생의 의의와 자기 가치를 인식하게 된 요안은 가벼운 기쁨을 느끼고 있다. “이제야 삶의 희열을 느끼게 되었다. 나도 이젠 내 문제를 내가 처리할 수 있다. 새 목표를 향해서 전진해 보자. 과거같이 내 문제를 남에게 맡기는 비접한 방법은 취하지 않겠다.”

요안이 자기 자신을 알게 된 다음에는 남을 탓하던 마음이 차차 누그러지게 된다. 이해심이 생기게 됨에 따라서 비판 보다는 이해를, 악으로 단정하기보다는 선으로 해석하려는 경향으로 흐르게 된다. 그전에는 외적으로 드러나는 남의 행동만을 보고 경솔하게 그 사람의 동기와 양심까지도 판단하는 것을 예사로 여겼었다.

저까지도 범했다고 단정해 버렸었다. 그러나 이제 요안의 마음과 태도는 눈에 떨이만큼 달라졌다. 타인의 잘못이나 나쁜 행동이 혹시 눈에 띌지라도 그 행동 이면에 숨어 있는 동기와 불가피한 사정의 유무를 보려고 힘쓴다. 남의 잘못에 대해서도 판단하기에 앞서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그 사람의 행동 이면에 혹시나 자유를 막는 감정이나 공포가 숨겨져 있는 것이 아닌가 알고자 한다. 자기 안에 무의 식 중에 생겨났던 방비책들이 다른 사람들 안에서도 마찬가지로 생겨난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다.

자기 자신까지도 자기 자신을 알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내 자신으로서도 나를 판결하지 아니하노라”하신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스스로 깨닫게 되었다.

하느님만이 남의 마음을 알고 판단하실 수 있기 때문이다.

 

“나를 판단하시는 자는 주시니라. 그러므로 주 임하시기 전에는 시기를 앞서 판단하지 말지어다. 저는 어두움에 감추인 것을 비추시고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시리니, 저 때에 각자는 자기에게 마땅한 칭찬을 하느님께 받으리라.”

 

이해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은 누구일까? 말할 것도 없이 예수님이시다. 이해함의 원천이신 예수님이야말로 이해하는 마음의 제 일인자가 아니겠는가!

그러나 예수님은 보통으로 자기의 대리자를 통해서 우리와 상대하신다.

부자거나, 가난하거나, 유식하거나, 무식하거나, 피부색이 검거나, 희거나를 막론하고 이해해주는 사람이 될 수 있다.

“사람을 바른길로 인도하는 자는 누구나 빛나는 별처럼 될 수 있다.” 지푸라기로부터 찬란한 다이아몬드가 되도록 이끌어 주는 사람이 바로 그 사람이다.

자발적이며 이익을 추구하지 않는 사랑과 이해, 그것은 무조건적인 것이었다. 이 행위는 성경에 기록된 이웃에 대한 위대한 사랑의 계명을 훌륭히 채우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를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동등시 하지 않으셨던가?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를 섬기는 방법이 아니고 무엇이랴? 왜냐하면 "이 미소한 형제 중 하나에게 베풀 때마다, 곧 하느님께 베푼 셈이" 되는 까닭이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니라. 그런즉, 사랑에 머무르는 자는 하느님 안에 머무르며, 하느님 또한 저 안에 시드니라.”(요안 1서 4,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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