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강
이야기 속에 존재하는 아래로부터의 영성
아래로부터의 영성에 관한 좋은 예로 세 가지 언어에 관한 이야기를 들 수 있다.
“이 이야기 속에서 한 얼간이는 아버지의 요청으로 바른 것을 배우기 위해 먼 이국땅으로 가게 되었다. 그 후 세 번이나 집에 돌아와 무엇을 배웠느냐는 아버지의 질문에 그가 첫 번째로 한 대답은 다음과 같다: ‘아버지, 저는 개들이 어떻게 짓는가에 대하여 배웠습니다.’ 그의 두 번째 대답은 ‘새들이 어떻게 말하는가’를 배웠다 했고, 세 번째 대답은 ‘개구리들이 어떻게 노래하는가’를 배웠다 했다. 이러한 아들의 대답에 그를 지성적인 작업을 할 수 있는 사람으로 키울 가능성을 전혀 찾아볼 수 없었던 아버지는 큰 실망감에 심한 화를 내면서 그 얼간이 아들을 밖으로 쫓아내고 말았다”(Laiblin 295 이하). 그는 밖으로 쫓겨나 정처 없이 걸어가다가 한 성에 도착하여 하룻밤을 묵어가고자 했다. 성의 주인이 그에게 잠자리로 내줄 수 있는 곳은 오직 사납게 짖어대는 개들이 살고 있는 성탑뿐이었다. 개들은 이미 수많은 사람들을 물어뜯은 경력이 있는 아주 사나운 놈들이었다. 그러나 그는 두려움 없이 먹을 것을 조금 가지고 성탑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짖어대는 개들에게 매우 다정한 태도로 말하기 시작했다. 개들은 보물 하나를 지키느라고 그렇게 사납게 짖는다는 것을 그에게 드러냈다. 그리고 또 그에게 보물이 있는 곳으로 가는 길을 알려주었으며, 보물을 찾아 꺼내는 것을 도와주었다.
내 안에 숨겨져 있는 나의 보물에게 다가가는 길도 사납게 짖는 개들과 대화함으로써, 나의 고통, 나의 문제, 나의 두려움, 나의 상처 등, 내 안에서 짖으면서 나의 에너지를 쇠진시키는 존재들과 대화함으로써 갈 수 있다. 위로부터의 영성이라면 그 사나운 개들을 성탑 안에 가두어두고 그 옆에 하나의 이상적인 건축물을 세우려고 할 것이다. 그렇게 할 때는 혹시 개가 문을 부수고 뛰쳐나와 사람을 물지나 않을지 언제나 걱정해야 한다.
열심한 사람에게는 자신 안에 늘 자리잡고 있는 욕구와 외부에 서 다가오는 유혹이 언제나 걱정거리들이다. 그래서 이들은 삶을 자유롭게 펼쳐나가지 못하고 자신이 설정한 울타리 안에 가두어 버리게 된다. 우리가 억압하거나 한쪽으로 밀쳐두는 것들은 한편으로 우리의 생명력이기도 하기 때문에, 억압하는 것과 한쪽으로 밀쳐두는 것이 많을수록 그만큼 우리의 생명력은 활기를 잃게 된다. 사납게 짖어대는 개들은 왕성한 생명력 속에 있는 것이다. 우리가 이 생명력이 왕성한 개들을 가두어버리면, 그만큼 우리에게는 하느님과 우리 자신에게로 나아가는 길에 필요한 힘을 잃게 된다. 성탑은 인간이 스스로를 성장시켜 나가 되어야 하는 존재의 한 표상이다.
성탑은 땅속 깊이 자리잡고 있는 튼튼한 기초에서 시작하여 하늘 높이 솟아 있다. 성탑은 일반적으로 둥근 형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것은 전체를 표상한다. 만약 우리가 순수한 이상주의를 지켜가기 위해 우리의 사납게 짖어대는 개들을 가두어둔다면, 우리는 그것들이 언제 밖으로 뛰쳐나와 물어뜯을지 알 수 없는 상 황 속에서 불안해하며 살아가야만 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으로부터 도망치고자 하며, 우리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다. 우리가 자신 안으로 들어올 경우에, 그 안에서 짖어대는 위험한 개들을 만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그 개들이 밖으로 못 나오도록 가두면 가둘수록, 그만큼 더 그 개들은 우리에게 위험한 존재가 될 것이다.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용기를 내어 그 성탑 안으로 들어가 사납게 짖어대는 개들에게 상냥한 태도로 다정하게 대화하는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자신들이 어떤 보물들을 지키고 있는지 나에게 알려줄 것이다. 내 안에 들어 있는 하나의 새로운 생명력과 순수함이 그 보물일 수 있고, 하느님께서 본래 만드신 참된 나 자신이 보물일 수도 있는 것이다.
아래로부터의 영성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이야기는 유명한 「홀레 부인」이다. 골드마리는 계모에게 학대받는 불쌍한 소녀다. 그 불쌍한 소녀는 큰길 한 우물가에서 매일 손가락에서 피가 날 정 도로 많은 양의 베를 짜야만 했다. 골드마리는 베를 짜는 데 사용한 피로 물든 실패를 씻다가 그만 우물 속에 빠뜨리고 말았다. 당황한 골드마리는 실패를 건지려고 우물 안으로 내려잤다. 그런 데 그곳에서 그녀는 어머니의 손길을 지닌 홀레 부인을 만나게 되었다. 그곳에서 골드마리는 충만된 삶을 체험하게 된다.
이 이야기를 심층심리학적으로 분석한 라이블린Laiblin은 이 이야기가 “위에서 고통을 받는 사람은 아래로 관심을 돌린다”는 중국 속담이 옳다는 것을 증명한다고 했다(Laiblin 280). 만약 우리의 삶에서 밖으로 빠져나갈 수 없는 막다른 처지에 직면하여 곤란을 겪을 때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하느님께 맡기는 것이 큰 도움이 될 수 있다. 우리 자신의 노력만으로는 한계를 느낄 때. 혹은 선 한 의지를 모두 동원하여 애써보았으나 더 큰 고통만이 있을 때, 단순히 그 상황에 맞추어 들어가거나 포기해 버리는 것은 결코 좋은 방법이 아니다. 우물 안으로 뛰어 들어가는 것, 자신의 깊은 곳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통해 새로운 영역 안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기회. 영혼의 영역을 알아볼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된다. 이러한 기회들을 통해 우리는 하느님의 은총을 표상하는 금으로 된 비Goldregen를 만날 수 있다. 그것은 동시에 포근한 어머니의 품과 같이 따스하고 자비하신 하느님의 영역이기도 한 것이다.
홀레 부인은 게르만족의 여신인 훌다Hulda를 의미한다. 홀레 부인은 자비하신 하느님이 지닌 어머니의 사랑과 같은 사랑의 상징이다. 만약 우리가 우물 안으로 뛰어 들어간다면 그 사랑의 손길 안으로 들어가는 셈이다. 드레브만은 골드마리의 계모는 일반적인 “세상의 여인”들을 대변하는 존재이고, 홀레 부인은 하느님이 계시는 내적인 세계를 대변하는 존재로 우리가 골드마리처럼 용기를 내어 안으로 들어가면 만날 수 있다고 한다. 우물 밑바닥에 서 골드마리는 사물의 내적인 측면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곳에서 골드마리는 세상을 꽃이 만발한 초원으로 체험하게 되고, 모든 사물들은 본질적으로 좋은 것이며, 그녀는 이러한 좋은 요소들을 충만히 선사받았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된다(Drewerman, Frau Holle 참조). 한계상황들이 우리에게 하나의 기회가 될 수 있다. 그 속에서 우리는 세상이 지닌 신비와 우리 영혼의 세계 안으로 깊이 나아갈 수 있으며, 새로운 지평선들과 내면의 세계가 지닌 부유함을 발견할 수도 있고, 그래서 변화를 체험하게 된다.
후베르투스 할브파스Hubertus Halbfas가 쓴 한 이야기에서도 우물에 관한 표상은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우리의 길을 지칭하는 상징이 된다. 한 젊은이가 자기 형 둘을 한 우물가로 모셔가려고 했다: “나는 형님들을 자신들의 본질을 알 수 있는 곳으로 모셔가려고 합니다.” 우물가에 이르자 그 젊은이는 큰형에게 말했다:
형님을 줄에 묶어 우물 안으로 내려 보내겠습니다. 이 우물 속에 무엇이 있는지 자세히 관찰해 보십시오.
그러나 큰형은 우물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두려워했고, 둘째 형도 마찬가지였다. 그 젊은이만이 기꺼이 우물 안으로 들어갔다 (Halbfas, Der Sprung in den Brunnen 참조). 막내는 자신의 모든 어두운 부분 을 거쳐 바닥에까지 내려가는 용기를 가졌던 것이다.
한 교육 과정에서 필자는 그 과정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친구가 자신을 줄에 묶어 우물 안으로 내려보내는 것을 가정하면서 그 속에서 무엇들을 만나게 되겠는지 생각해 보라고 제의한 적이 있다. 우물 속으로 들여보내지는 것은 많은 사람들에게 두려운 일이었다. 이윽고 그들은 자신들이 그 속에 들여 보내진다고 생각하고 각자 생각에 잠겨들었다. 한 사람은 그 속에서 맑은 물을 발견하여 목을 축였고, 다른 사람은 자기 아버지를 만나게 되었는데, 그 아버지가 그를 삶의 신비 안으로 인도해 갔다. 어떤 사람은 아름다운 경치를 발견했고, 또 다른 사람은 값진 진주를 발견 했다. 하여간 삶의 새로운 차원으로 나아가는 길은 자신의 가장 깊은 밑바닥으로 내려가는 것을 거쳐야 되는 것이다.
금열쇠에 관한 이야기에서 한 불쌍한 젊은이가 불을 지피기 위해 쌓인 눈을 치우다가 금열쇠를 발견했다. 그가 그 자리를 더 마 내려가자 철로 만든 상자를 발견했고, 그 열쇠는 이 상자의 자물쇠에 맞아 들어가는 것이었다. “그는 그 상자를 이리저리 돌려보고, 열쇠를 자물쇠에 넣고 한 번 돌려보았다. 이제 우리는 그가 그 자물쇠를 완전히 열고 그 다음 상자의 뚜껑을 열어서 그 안에 어떤 멋진 물건들이 가득히 들어 있는지 볼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려 보아야 한다”(Laiblin 276).
여기서도 보물은 깊숙한 곳에 들어 있다. 그전에 먼저 하나의 어려움이 있었고, 젊은이는 그 어려움을 자신이 지금까지 익혀서 잘 아는 방법으로 극복해 보려고 했다. 이 이야기가 우리에게 말하는 것은, “우리가 어둠, 착오, 곤경, 두려움, 부자유 속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지치기만 하고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될 때. 바로 그곳에 우리를 하나의 완전히 새로운 세계, 구원의 세계로 인도해 주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선물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이다”(Laiblin 277). 라이블린은 이런 이야기를 두 세계를 말해주는 이야기로 지칭한다. 미래가 안 보이는 어려운 상황, 운명적으로 주어져서 삶을 고통스럽게 만들고 죄어오는 상황은 그것을 당하는 사람 중에서 용기를 가진 사람이 새로운 세계를 향해 자신 의 문을 열도록 하여, 그곳에서 그때까지 알지 못했거나 잊어버리고 있던 생명력이나 생명의 샘을 찾도록 한다. 깊은 곳에서 그는 매우 값진 것을 발견하여 그것을 자신의 세계로 가지고 나와 건강한 삶을 살아가는 데에 사용한다.
두 세계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이야기는 우리 모두에게 아래로부터의 영성의 길을 알려주고 있다. 우리의 삶을 위한 하나의 새로운 샘을 발견하기 위해서 우리는 반드시 아래로 깊이 내려가야 한다. 말라버린 텅 빈 우리의 삶을 새롭게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아래로 내려가야만 한다. 변화를 가져다주는 힘을 발견할 수 있는 곳은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의식의 세계, 이 지상의 세계가 아니라 오직 깊은 곳이다. 아래로 내려가는 길은 신뢰, 자신을 믿고 내맡기는 것, 자신을 내놓는 것, 일이 생겨나도록 두는 것 등을 거치게 된다. 내가 이 길을 갈 수 있는 것은 스스로의 결정에 의해서가 아니다. 오직 내가 불림을 받을 때 갈 수 있는 길이 다. 오직 생명의 소리를 듣는 사람만이, 그 소리를 듣고 순응하는 사람만이 깊은 곳에서 생명의 샘을 발견할 수 있다. “페크마리Pechmarie와 같이 자기 자신에게 매달려서 자의적이며 이기적으로 그리고 나쁜 호기심에만 이끌리는 미성숙 속에서 걸어가는 사람은 방황하고 벌을 받게 된다”(같은 곳 279). 그러나 필자는 자주 실패와 고통의 상황을 겪고 나서야 비로소 생명의 샘을 찾기 위해 아래로 내려가게 된다.
[출처: 안셀름 그린, 『아래로부터의 영성』, 66-72쪽 참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