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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8강

인간의 성장 과정과 대인관계

*앞으로 손 에드워드 신부님이 지은 <조건없는 사랑>을 나누어서 소개하려 한다. 차례는 손 신부님의 책에 따랐고, 되도록 손 신부님의 문장을 손보지 않고, 발간 당시(1967년)의 문체를 그대로 두려고 한다.

1. 인간의 성장 과정과 대인관계

 

사람은 어떤 모양으로 자기를 사랑하거나 미워하게 되는 것일까? 이 물음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어린이 시절로 돌아가야 한다.

사람마다 아기로 태어날 때는 인간 그 자체로 보아서 누구나 예외 없이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인간이라는 그 존재 자체로 보아 아주 아름답고 보배롭고 사랑스러운 것이며, 마치 값진 다이아몬드와 같은 것이다. 그러나 애기는 태어나는 순간 자기 자신에 관해서 백지와 같은 상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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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자면 자기가 좋은지, 나쁜지, 사랑스러운지, 미움을 받을 만한 것인지조차 모른다. 또한 딴 사람과 비교해서 좋은지 나쁜지도 모른다. 가치와 존엄성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른다. 한마디로 말해서 애기는 자기의식에 있어서 감각 이외의 다른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그러면, 어떠한 방법으로 자기 자신을 알고 판단하게 될까? 그것은 대인관계로 말미암아 자기 자신을 알게 되고, 또 사랑하거나 미워하게 된다. 즉, 점점 자라면서 그 백지장 위에 조금씩 무늬가 놓여지게 되는 것이라 하겠다. 애초에는 부모를 제일 먼저 상대하게 된다. 대인관계는 처음으로 부모를 통해서 이루어지지만 점점 자라면서 그 범위는 형제, 친척, 친우 등으로 번져가기 마련이다.

보통으로 부모들은 아이들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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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다른 영향도 있지만, 형제나 또는 친척 혹은 친구라 든지······ 그러나 대인관계 중에서 가장 기초가 되는 부모와의 관계부터 먼저 살펴보기로 하자.

부모들은 현재 있는 그대로의 애기를 받아들이고 귀여워하고 잘 돌봐 주고, 특히 어머니가 애기를 안아 주고 따뜻한 미소를 던져 주고 제때에 젖을 주고 귀하게 여길 적에 애기는 방실방실 웃고 재롱을 부리며 안심한 표정을 짓는다. 그와 반대로 어머니가 냉정하고 애기가 요구하는 것을 귀찮게 여기고 신경질을 부릴 때, 애기 얼굴에는 불안감이 감돈다.

아마 애기는 이렇게 느낄 것이다. “나 때문에 엄마의 기분이 나쁜가? 내가 나쁜 것인가? 엄마가 날 미워하는 것일까? 내가 보기 싫은 때문인가?” 물론 같은 애기들이지만 차이가 많을 것이므로 일률적으로 확언(確言)할 수는 없지만 보통으로 그런 분위기 속에서는 애기 얼굴에 근심과, 공포와 불안감이 엿보이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 애기가 점점 자라감에 따라 그의 대인관계도 어른다운 것으로 발전해 나간다. 이때가 되면 어머니는 말하기를, “요안아, 엄만 널 사랑해”한다든지, 혹은 아버지가 “요안, 너는 착한 아이다”라고 한다든지 하는 칭찬이 거짓 없는 사랑으로 자주 되풀이된다면 요안은 마음속으로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나는 사랑스럽다, 나는 가치가 있다”고. 그러나 어머니나 아버지가 요안에게, “네가 동생과 자주 싸우면 밉다” “방을 더럽히면 너는 바보다” “어째서 넌 언니를 본받지 못하느냐?” “아버지의 사랑을 얻고자 원한다면 학교에서 우등생이 되어야 한다” “요안, 네가 예뻐서 사랑한다” “까불면 밉다” “네가 못되게 굴면 하느님도 널 미워하실 거다” 등의 조건이 붙은 여러 가지 말을 되풀이한다면, 요안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어떻게 느껴지겠는가?

부모의 이런 말을 자세히 분석하면 자기네들의 사랑에 조건을 붙임이 확실하다. 이러한 과정이 되풀이됨에 따라 요안의 어린 마음속에는 “사랑”이란 이런 것인가 하는 느낌이 싹트게 된다. 다시 말하면, “내가 사랑을 받으려면 내가 먼 저 무엇을 해야만 되고, 무엇을 피해야만 되고, 또 무엇을 가져야만 하고, 무슨 성공을 해야만 되는가 보다”고 여기게 된다. 한마디로, 자기 가치나 존엄성을 인간 그 자체로서 그냥 가지는 것이 아니라, 자기 행동에 따른 다른 사람의 의견, 반응, 표정 따위에 의해서 좌우되거나 그들의 판단에 매여 있는 것으로 생각하게 된다.

 

 

결국 아이들은 자신의 행동에 따라 사랑을 받기도 하고 못 받기도 한다고 판단하게 되므로, 사랑이란 자신의 행동 여하에 따라 받을 수 있다고 느껴, 사랑을 오직 행동의 값으로 갚어지는 것으로 단정할 뿐 아니라, 부모들이 제시한 조건들을 채워 드리느냐 못 채워 드리느냐에 따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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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사람이 되거나 나쁜 사람이 되는 것으로 여기게끔 된다. 즉, 자기 그대로의 자신만으로 좋고 나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기대하는 조건을 채우느냐, 못 채우느냐에 따라서 좋게 되기도 하고 나쁘게 되기도 하는 줄로 여기게 된다.

따라서 조건을 채우지 못하면 못할수록 사랑을 받지 못하는 것으로 여기게 된다. 이런 성질의 대인관계를 계속해 나가면서 인간은 차츰 자신을 알게 되며, 결과적으로 자기 자신을 사랑하거나 미워하게 된다.

부모들이 요안에게 어떤 조건을 제시하는 목적은 조건을 채울만한 어떤 표준에까지 요안을 끌어 올려 보자는 심산이다. 그러나, 그것은 비록 일시적으로는 만족스러운 감을 줄런지 모르겠으나, 자식의 장래를 위한 처사는 아니라고 본다. “확고한 인격의 형성에는 항상 부모 특히 어머니의 뒷바라지가 따른다”는 말이 있듯이 어느 부모를 불문하고 자기들의 자녀들을 우수한 아이로 육성(育成)하고 싶은 것은 공통 된 소망이라 생각한다. 혹자는, “부모들이 자녀에게 조건을 제시하는 것은 그들이 보다 잘 되기 위한 일념에서 취해지는 수단이다. 바꿔 말하면, 사랑을 위한 사랑이다”고 말한다.

어떤 때 부모나 혹은 다른 지도자들은 직접 말로서는 조건을 붙이지 않는다손 치더라도, 간접적으로 달리 붙일 수 있다. 자기 태도나 표정으로, 사랑에 조건이 있게 마련이라는 것을 은연중에 인식시킬 수도 있다. 마치 문을 열었다 닫았다 하는 것처럼 아이들이 자기 요구를 실천하느냐 않느냐에 따라서 사랑을 주기도 하고 거두기도 하며, 혹은 편정을 두거나 아주 엄한 태도를 취하기도 하며, 때로는 벌써 예전에 저질렀던 잘못에 대해서도 새삼스러이 되풀이해 나무라기도 하고, 또는 아이들이 어떤 조건을 채우지 않을 때는 사랑하지 않겠다고 위협을 줌으로써 간접적으로 할 수 있다.

그러나, 엄격하게 대하는 것보다 더 해로운 것은 지나친 애정으로 아이들을 노예나 인형 같은 장난감으로 만들거나 아이들의 인격을 전혀 무시하여 버리는 것이다.

말하자면, 아이들을 마냥 부드럽고 상냥스럽게만 대해주고 감싸줌으로 자기 이익만을 구하려 할 수도 있다. 이런 경우에 아이들에 대한 부모들의 사랑은 아이들로부터 사랑에 대한 보답을 얻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이렇게 하는 것이 아이들에게 훨씬 더 해로운 이유는 그 아이들은 일생을 통해서 참사랑을 받고 있는 줄로 착각하여 그들은 자기들이 인격적으로 죽게까지 된다는 무서운 사실을 깨닫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올바르지 못한 사랑을 베푸는 것은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미워하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이 글을 읽고 나면, 왜 부모들이 이렇게 하는가에 대해서 알 수 있을 것이다. 짧게 말하자면, 그러한 부모들 자신들도 조건 없는 사랑을 경험해 보지 못한 탓으로 사랑에 굶주린 나머지 자기 아이들로부터 너무 지나치게 사랑을 구하려고 하는 소치(所致)이다. 사랑과 효도를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아이들을 너무 지나치게 돌봐 줌으로써. 그 아이들에게 자주성(自主性)을 길러 주는 대신에 의타심(依他心)만을 더 길러 주게 되어 약해 빠진 의지의 소유자를 만들고 만다. 요안 같은 아이는 그러한 거짓 사랑을 겉으로는 즐겨 받아 주기는 하지만, 마음속에서는 무의식중에 원망하기도 하고, 자기는 참사랑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야 만다. 말하자면, 부모님을 위한 장난감에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는 말이다.

어떤 부모는 자기 체면이나 앞날의 생활 수단으로 아이들을 사랑한다. 부모가 자녀에게 절도(節度)와 예모와 성격의 완전을 너무 강조하면, 그런 분위기 속에서는 그러한 조건이 붙은 사랑을 얻기가 어렵기도 하고 불가능할 수도 있다. 엄격주의를 실천하는 사람들은 하느님 외에 완전하신 분이 없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

앞서 말한 대로, 아이는 태어날 때 자기가 무엇인지 누구인지 모른다. 그러나, 사람은 철학, 심리학, 윤리학을 바탕으로 하여 더 나아가서는 하느님의 계시를 통하여 자신이 참으로 보배롭고 아름다웁고 또 한없는 신비성을 지닌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된다. 누구나 예외 없이 영원하고 불사불멸하며 매우 아름다운 것이다. 그것은 사람마다 영원하고 단순하고 불사불멸하는 영혼을 지니고 있고, 각 사람에게는 유일무이한 특성과 지력과 자유 의지와 사랑할 수 있는 힘과 독창력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온 우주보다도 더 큰 가치가 있고, 태양, 달, 별, 바다와 같은 자연의 모든 아름다움보다도 더 기막히게 아름다운 것이고, 세상의 모든 보화와 재물보다도 더 기막히게 귀중한 것이다.

더 놀라운 사실은, 사람이 하느님의 모습을 따라 조성되었고, 하느님의 성총을 누릴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사람을 우리와 비슷이 우리 모습대로 만들어 바다의 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모든 짐승들과 땅위에서 기는 모든 길짐승들을 다스리게 하리라」(창세기 1,26) 하시지 않으셨던가! 또 하느님의 외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사람이 되심으로써 인간의 존엄성을 더욱 확보하여 주셨고, 십자가상에 못 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써 인간을 구속하시고, 영광스럽게 만드셨다. 따라서 요안은 실로 보배롭고 찬란하고 진귀한 다이아몬드와 같으며, 하느님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사랑스러운 존재로 이 세상에 왔다. 이 존엄성은 인간의 행동 여하에 따라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인간 자신이 무엇을 하여 그 댓가로 받는 것도 아니다. 우리 인간을 먼저 사랑하신 하느님께로부터 거저 받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요안이 자기 자신을 살필 적에, 바로 자기 자신이 하느님의 사랑으로 말미암은 다이아몬드 같은 위대한 걸작이라고 느낄 수 있을까? 철학자도 심리학자도 더구나 신학자도 아닌 어린아이에 불과한 그가 이같이 깊고 신비로운 진리를 인식하기란 아주 어려울 것이다. 전문적인 지식과 연구가 없는 그로서는 자기에 대한 타인의 반응과 태도와 판단에 따라서 자기 자신의 존재 가치를 판단할 수 있을 따름이다. 즉, 자기에 대한 다른 사람의 태도와 반응과 표정과 판단이 거울이 반사하듯 자기 자신을 자기 자신에게 보여 지게 하는 것이다. 이 반사 작용으로 말미암아 요안은 자기 자신을 보고 자신의 가치를 평가한 후에 자신을 사랑하거나 미워하게 된다.

사람을 얻기 위하여 채워야만 하는 몇 가지 조건을 요안을 전형적 본보기로 살아 예를 들어 보기로 하자. 여기서 필자가 독자들에게 미리 양해를 구하는 것은, 결점의 수많은 종류 품 요안이란 주인공에게 일일이 적용시키자니, 그는 마치 장점은 별로 눈에 띄지 않는 결점투성이처럼 보여질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니 이 점을 참작해 주십사하는 것이다.

부모님이 요안을 보고, “완전 무결하게 행동하라” “특대생이 되어라” “아버지나, 형같이 되어라” “의사나 변호사가 되어라” “가문을 빛내라”라는 등의 말을 한다면, 실현 불가능한 것으로 느껴질 가능성이 많다. 취미가 없다. 능력이 미치지 못한다는 등의 이유로 부모들이 제시한 위와 같은 조건들을 채우지 못한다고 가정해 보자.

이런 경우에 요안은 무의식중에 자기는 남의 미움을 받는 것처럼 느껴지고, 열등감이 생기고 의욕을 잃어버려 무능하고 쓸데없는 사람으로 자기 자신을 업신여기게 되므로 차츰 보석의 빛을 잃어 가게 되지 않겠는가? 사랑을 구할 수 없는 것으로 생각되어 질수록 요안은 사랑을 더욱더 목말라 한다. 사랑에 굶주림을 느끼면 느낄수록 요안은 열등감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게 된다.

요안이 이런 처지에서 자기 자신을 깊이 살필 때마다 무엇을 느꼈을까? 인격자도 아름다운 다이아몬드도 아닌, 다만 더럽혀지고 버림받은 쓰레기같이 무가치한 자신을 발견할 뿐이다. 그는 실망한 나머지 이렇게 중얼거릴는지 모른다.

“나는 아무 쓸데 없는 존재다” “바보다” “살만한 가치도 없다”라고, 비관에 빠져서 자기 자신에 관해서 소극적이고 옹졸한 생각밖에 들지 않게 될 것이다. 즉,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의 상태에서 조건 없이 받아들이지 못하게 된다. 한 마디로, 마음의 상처를 입게 되고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않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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