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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7강

​사랑을 위하여! - 손 에드워드 신부님의 <조건 없는 사랑>을 교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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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세상을 떠난 민족시인 윤동주(1917-1945년)가 쓴 ‘봄’이라는 시를 묵상해 본다.

 

 

 

봄이 혈관 속에 시내처럼 흘러

돌,돌, 시내 가까운 언덕에

개나리, 진달래, 노-란 배추꽃

 

삼동을 참아온 나는

풀포기처럼 피어난다.

 

즐거운 종달새야

어느 이땅에서나 즐거웁게 솟쳐라.

 

푸르른 하늘은

아른,아른, 높기도 한데…

 

또 에리히 프롬이 <사랑의 기술>이라는 책에 남긴 말을 옮겨본다.

 

꽃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꽃에 물을 주는 것을 잊어버린 여자를 본다면, 우리는 그녀가 꽃을 ‘사랑한다고’ 믿지 않을 것이다. “사랑은 사랑하고 있는 자의 생명과 성장에 대한 우리의 적극적 관심이다.” 이러한 적극적 관심이 없으면 사랑도 없다.

 

우리 인간은 사랑의 덕행을 닦아 나아가지 않으면, 사랑의 하느님 아버지의 완전함을 닮으려는 완덕의 길로 나설 수 없다. 다시 말해 사랑의 덕행을 닦아서 사랑의 능력을 길러내야 한다는 것이다. 사랑하는 능력도 사랑을 받아 본 체험을 바탕으로 한다. 사랑하면 할수록 사랑의 능력은 커질 수 있다. 사랑을 받아본 사람이 사랑할 수 있다. 그래서 하느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인 우리 그리스도인은 사랑해야 할 의무가 생긴다.

 

사랑은 사랑이신 하느님과 이웃 인간들의 사랑을 받고서, 다시 사랑하게 되는 관계에 있다. 사랑은 무한하고 조건 없는 사랑을 주시는 하느님의 자비를 이웃과의 관계에서 확인하는 것이다. 곧 하느님의 조건 없는 내리사랑을 대인관계에 그대로 실천하는 일이다.

 

인간은 무엇으로 사는가! 빵만으로는 살 수 없다. 빵만으로 사는 삶은 그저 동물적 생존방식이다. 인간의 실존은 그와는 다르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산다고 하셨다. 하느님의 말씀으로 산다는 것은, 사랑이신 하느님의 사랑으로 산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 인간 삶의 의미와 가치는 그 사랑에서 비롯한다. 하느님의 사랑 안에는 진리와 생명, 인간이 걸어가야 할 길을 포함하고 있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사랑은 어떤 사랑일까? 그 사랑을 알아보기 위해 오래전에 읽은 손 에드워드 신부님이 쓴 <조건 없는 사랑>을 다시 펼쳐본다. 내 손에 들려 있는 <조건 없는 사랑>은 성바오로출판사에서 1967년에 나온 책이니, 60년이 다 된 책이다.

 

손 에드워드 신부님은 1931년 미국 일리노이주 시카고에서 태어났다. 1945년 메리놀회에 입회한 뒤, 13년 뒤인 1958년 뉴욕 메리놀신학교에서 사제서품을 받았다. 그해 한국으로 와서 청주교구 대학생 지도신부로 지내다, 청주교구 청산본당 주임신부로 2년 동안 사목을 하고, 이후 광주 대건신학교에서 교수 신부로 있다가, 1968-1972년 서강대학에서 카운슬링 지도 교수로 재직했다. 안타깝게도 1972년 41세의 나이에 서울 메리놀수도원에서 선종했다. 손 신부님은 현재 용산 성직자묘지에 계시다.

신부님의 영원한 안식을 빌며, 고차원적 사랑을 설파하시는 손 신부님의 <조건 없는 사랑>을 교재로 삼아 전해드린다. (될 수 있으면 원문에 손을 대지 않고 그대로 전해드리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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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 성바오로출판사에서 나온 손 에드워드 신부님의 <조건 없는 사랑>

조건 없는 사랑

 

머리말

 

많은 사람들은 인격 지도에 관한 방법론에 관해서 여러 가지 문제점을 말해 줌으로써 그 결과에 따라 많은 이들이 점점 심각한 태도로서 이 문제를 다루고 다년간에 걸쳐 연구에 연구를 거듭해 왔다. 이에 따라 인격 형성에 따르는 인간 본연의 심적 상태를 알아내는 데 크나 큰 발전을 보게 되었고 나아가서는 인간이 인간 자신을 어느 때 보다도 올바르게 인식하고 자신의 문제를 자신이 개척해 나갈 수 있는 길을 모색해 내는 데 크나큰 공헌을 하였던 것이다.

특별히 몇십 년 전부터 많은 학자들에 의한 연구는 사람들에게 “인간이 무엇인가”라는 문제에 관해서 심각하게 논의하게 하였고, 인간을 좀 더 올바르고 진지하게 연구하게 하였으며, 드디어는 인간이 인간 자신에 관해서 올바른 인식을 가지기까지에 이른 것이다.

이 결과는 교리상에 많은 영향을 주었으니, 인간이 인간 자체를 더욱더 속속들이 알고 이해할 때 자연 인간은 하느님을 알게 되고 더욱더 하느님을 사랑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웃 사람을 자기 같이 사랑하라”(마테오 22,37-39절 루까 10,27절)는, 영신 생활의 비결인 이 말씀이 성경에 기록된 사람의 큰 계명 속에 들어있지만, 그러나 “자기 같이”란 부분은 영적 책자나 신심 생활의 책에나 교리책에 아주 드물게 언급되어 있다. 이 사상을 다음과 같은 대화로 이끌어 나갈 수 있다.

“우리 자신을 사랑하는 것은 우리의 본분이다.”

“남을 사랑하려면 마땅히 자기 자신부터 먼저 사랑할 줄 알아야 한다.”

“우리는 참으로 사랑스럽고 귀하다.”

“갖가지 죄를 범하는 이유는 우리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자기 사랑 (자기 자신을 사랑함)이 부족한 것이 큰 문제다.”

“결점이나 죄를 극복하려면 먼저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데 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죄와 결점 그리고 신경질 이면에는 더 근본적인 원인이 있으니, 그것은 자기 사랑이 (자기 자신을 사랑함) 부족한 때문이다.”

이렇게 주장하는 말을 듣고서 사람들은 여러 가지 반응을 보인다. 놀라기도 하고 의심하기도 하며 심하게 반대하기도 한다.

어떤 이는 이 사상이 옛날부터 배웠던 겸손에 대한 가고 침과 겸손의 본질과 모순이 된다고 말할 것이다. 그리고 인간은 본질적으로 나쁘다는 이단, 즉 “양세니즘”에 물든 사람들이 열을 띠고 반대할 것이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내가 길거리에 나가서 큰 소리로, ‘나는 내 자신을 사랑한다’고 외친다면 아마 듣는 사람들은 나를 보고 정신이 돌았다고 말할게다.” 또 다른 사람은 말하리라, “무슨 말이냐? 내 결점은 내 자신을 미워하기는 고사하고 지나치게 사랑하기 때문에 생긴 것이다”라고.

그러나 “이웃 사람을 자기 같이”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것이지 다르게 해석할 필요가 없지 않은가? 혹시 자기 사랑이 교만이라 할 수 있다면. 예수님께서 가르치셨던 바의 사랑이 아니겠지요. 하여튼 자기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은 신기하게 느껴질 수 있는 성질의 것이며 따라서 많은 설명이 요구된다.

심리학의 현대 발전이란,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새로운 많은 원리를 발견했다는 점이다. 심리학자를 통해서 신학자들은 인간이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되었다는 점에 관해서 배우는 바가 많다. 대인 관계를 관찰할수록 사랑의 본질과 사랑의 필요성에 대해서 많이 배우게 되고 인격 발전과 윤리 생활에 사랑의 영향이 얼마나 큰 무게를 차지하는지, 그리고 사랑으로 말미암아 인간 상호간에 얼마나 많은 영향을 주고받는지, 또 영육의 병을 치료하는 데 그 힘이 얼마나 큰지 알게 되는 것이다.

성은 자연을 초자연으로 들어 높인다. 성총은 인간의 대인 관계를 향상시킨다. 또한 성총이 인간의 자연적 사랑을 없이 하거나 가로막지 않는다. 성총과 인간의 사랑은 완전히 일치해서 하나로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을 알면 알수록 성총과 성총의 작용을 더 깊이 깨달을 수 있다.

인간의 본성을 특히 인간의 사랑을 알면 알수록, 그만큼 예수님을 더 잘 알 수 있다. 인간 상호간의 대인 관계를 깊이 관찰할수록 삼위일체를 이해하기가 더 쉬워진다. 왜냐하면 성삼의 서로의 관계는 마치 인간의 대인 관계와 비슷한 면이 있기 매문이다. 또한 이 글의 목적은 인간의 사랑을 알면 알수록 하느님의 성총을 그만큼, 더 깊이 인식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는 데 있고, 나아가서는 하느님 자신을 더 잘 알고 더 굳이 믿을 수 있다는 데 있겠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니라, 그런즉 사랑에 머무르는 자는 하느님 안에 머무르며 하느님 또한 저 안에 머무르시나니라”(요안 1서 4,16-17).

또한 성총의 뜻이 무엇인지 묻는다면 서슴지 않고 아래와 같이 대답할 수 있다. 성총은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 맺어지는 사랑의 관계 즉 하느님이 사랑이시기도 하고 성총이 사랑이시기도 하다. 우리가 성총을 받으면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하는 것이고 하느님의 생명의 한 몫을 받는 것이다. 그리고 하느님의 생명은 세 위가 서로 사랑을 주고받는 것이니 우리 가성을 받을 적에 삼위일체의 생명 자체인 사랑을 받게 되는 것이다.

영신생활의 또 한 가지 근본적인 사상은 “어린이의 작은 길”이다.

“나 진실히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만일 귀화하여 어린이와 같이 되지 아니하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테오 18,3)

이 말씀은 가끔 그릇된 뜻으로 해석된다.

많은 사람들은 이 말씀을 곡해하여 “자기 자신을 얕보라. 자기 자신을 낮추기만 하라. 네가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생각하라. 네 자신을 사랑하지 말라”는 뜻으로 알아듣는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어린 아이와 같이”란 말의 참뜻은 절대로 그런 성질의 것이 아니다.

이 글의 취지는 인간이 그와 같이 비천한 지푸라기 같은 존재로 여김 받는 것이 절대로 부당하다는 것을 똑똑히 깨닫게 하고, 어린이의 정신이란 오히려 적극적이고 매우 아름답다고 인정되기를 기대하는 데 있다.

이 책자를 성삼 주일에 쓰기 시작한 것은 극히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필자대로의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로 이 책자는 대인 관계를 분석하는 것이니만큼 삼위일체의 상호 간의 긴밀한 사랑을 토대로 대인 관계를 설명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기는 때문이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신학자들은 자기들의 신학연구를 인격적인 방향으로 이끌어 나가고 있으며 대인 관계를 통해서 성충의 본질을 분석하고 있다. 둘째로 성삼 첨례날은 성녀 소화 데레사께서 70년 전 하느님의 자비하신 사랑 안에 자기를 봉헌하는 기도문을 만드신 날이기도 한 때문이다. “어린이의 작은 길”을 가르치는 것이 성경의 사명이라는 사상이 그 기도문 안에 내포되어 있다.

 

이제 이 책을 내면서, 저자가 아직 한국어에 익숙지 못하여 문장 구성에 있어서 부족된 점이 많이 있으리라 믿고 먼 저 독자 제위께 양해를 구하는 바입니다.

그리고 이 책을 내기까지 여러 가지 면으로 애써주시고 돌봐 주신 여러분께 이 자리를 빌어 심심한 사의를 표하는 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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