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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5강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사랑은 하느님을 잘 표현해주는 언어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사랑에서 하느님을 보다 잘 체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삶에서 하느님의 초월성을 체험할 수 있는 것은 이렇듯 사랑하는 이에게 마음의 문을 여는 데서다. 우리는 이 엶에서 하느님이라는 절대 타자에게 우리를 열 수 있다.

 

그때에 비로소 사랑이신 하느님을 우리 인간이 알고서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사랑이신 하느님 자신이 당신 자신을 아낌없이 내어주신 그런 사랑을 우리 인간도 할 수 있을 때 하느님을 알게 되고 체험할 수 있다. 게다가 우리는 사랑에서 거저 주고받음의 풍요로움을 배운다. 그리고 하느님은 거저 줌으로 자신을 계시하기 때문에, 우리는 이 거저 줌에서 하느님을 체험할 수 있다.

 

게다가 우리는 사랑에서 거저 주고받음의 풍요로움을 배운다. 그리고 하느님은 거저 줌으로 자신을 제시하기 때문에, 우리는 이 거저 줌에서 하느님을 체험할 수 있다. 앞에서 상대방이 그 자신을 우리에게 드러낼 때만 우리가 그를 알 수 있다고 한 말은 상대방이 자신을 드러내지 않을 자유가 있다는 뜻도 된다. 우리는 자신을 드러내고 싶어서 드러낸다. 우리가 우리 자신이나 어떤 일을 드러내기 싫어하면 상대방은 고문이나 압력 등으로 우리를 강요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자유 의지로 자신을 드러내는 것은 이러한 드러냄과 의사소통에서 우리가 풍요로워지고 사람답게 되는 관계를 이룰 수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느님은 그럴 필요가 없다. 하느님은 신이기 때문에 자신의 보다 큰 개인적인 풍요로움을 위해 자신을 드러내고 우리와 관계를 맺을 필요가 없다. 하느님은 자신으로 충분하다. 이는 하느님이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 순수한 거저 줌과 자유에서임을 뜻한다. 하느님은 사랑으로 우리가 잘 되길 바라면서 우리에게 나타나고 우리 삶에 들어오고 우리에게 거저 줌으로 자신을 연다. 하느님이 우리와 맺는 관계를 사랑보다 더 잘 표현해 줄 수 있는 다른 인간 언어는 없다. 그래서 신비가들은 하느님이 사랑이라고 말했다.

 

하느님이 사랑이라면 우리는 사랑하고 사랑받는 체험에서 하느님을 체험할 수 있다. 나를 사랑한다고 해서 아무것도 얻을 게 없는 사람으로부터 거저 사랑받는다는 것은 하느님이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는가를 가르쳐 주는 거저 줌의 체험이고 우 리롤 사람답게 하는 체험이다. 마르코와 마태오 복음사가는 예수가 이스라엘 사람들 사이에서 공생활을 시작하기 전에 위대한 하느님 체험을 했음을 신비적이고 시적인 언어로 들려준다. 마르코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그리고 물에서 올라오실 때 하늘이 갈라지며 성령이 비둘기 모양으로 당신에게 내려오시는 것을 보셨다. 그때 하늘에서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하는 소리가 들려 왔다(마르 1,10-11).

 

마르코는 이 본문에서 나자렛 예수의 전도 생활 시초에 인상적인 심오한 하느님 체험이 있었음을 우리에게 보여주려고 한다. “하늘이 갈라지며”는 하느님이 어떻게 그의 세계로부터 "자신을 열고" 예수에게, 인간에게 왔음을, 예수의 영적 체험이 하느님의 심오하고 거저 줌의 사랑 체험임을 보여준다. 단지 사랑할 수 있고 사랑에 마음을 여는 자들만이 사랑받는다.

 

여기에 이상한 순환 논법이 있다. 즉 단지 사랑받은 체험을 가진 자만이 사랑할 수 있고 사랑에 열려 있는 자만이 사랑받을 수 있다. 사랑을 믿지 않고 사랑에 마음이 닫혀 있고 그래서 다른 사람이 자신을 사랑하도록 허용하지 않는 사람들을 발견하는 일은 어렵지 않다. 한편 어떤 이들은 결코 사랑받은 적이 없어 사랑할 수 없다. 달걀이 먼저나 닭이 먼저냐라는 오래된 문제이다. 사랑하느냐 사랑받느냐라는 이 순환 논법을 깨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의 신비이다. 우리가 아는 것은 사랑하고 사랑받을 수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이것을 허용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는 사실이다. 사랑하고 사랑받는 능력이 어디서 기원하는가는 이성적 논리를 벗어나는 문제이다. 우리는 단지 아무도 사랑 없이는 자신의 인간성을 충만하게 실현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 뿐이다.

 

우리는 무상으로 사랑하고 사랑받는 신비, 사랑에 마음을 열 수 있는 능력의 기원에 관한 신비 앞에서 우리가 단순한 인간에 불과함을 상기할 수 있고 또 상기해 내야 할 것이다. 우리가 모든 것에 대한 답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우리는 모든 답을 다 갖지 못한 부끄러움에서, 우리의 진정한 현실을 인정하는 행위에서 하나의 가능성, 즉 거저 줌의 사랑 체험에서 사랑인 하느님을 조금 체험하고 있다는 가능성에 우리 마음의 문을 열 수 있다. 하느님이 사랑이라면, 그는 우리가 무상으로 사랑받고 사랑하는 체험, 우리를 사람답게 하는 체험의 기원이다. 하느님이 사랑이라면, 그는 다른 이나 절대적 존재에게 우리 자신을 개방하면서 보다. 높게 날도록 충동시키는 힘인 성령이다.

 

만일 하느님이 사랑 안에 현존하지 않는다면. 그가 우려를 삶 안에 현존하기는 매우 힘들다. 하느님이 이 사랑의 기원이나 토대가 아니라면 하느님은 사랑이 아닐 것이고, 우리를 중하게 여기지도 않고 자신의 세계에 닫혀 있으며 우리에게 “하늘이 열리지”도 않을 것이다. 그리고 하느님이 인간에게 관심을 두지 않는다면 우리 또한 그가 존재하는지, 그가 어떤 존재인지에 관해 더 이상 중요하게 여기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이 사랑이라면, 그는 인간적 사랑 안에 현존하고 있다. 하느님은 사랑을 거저 주고받도록 우리를 격려하는 힘이다.

 

하느님의 사랑이신 성령께 격려되는 이는 다 하느님의 자녀이니라. 그것은 마치 부모들의 부성애나 모성애 같이도 강력한 사랑의 인력인 것이다. 그러므로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첫째가는 계명으로 명령하실 수 있다는 것이다.

 

위대한 종교들은 사랑 체험으로 본 하느님 체험으로부터 출발하여 다른 이들에게 선한 일을 하는 일에 관한 계명을 발전시켰다. 이러한 윤리적 요구는 성서 전통에서 “내가 너희를 사랑하는 것처럼 너희도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유명한 표현으로 공식화되었다. 이 계명은 단지 윤리적 또는 도덕적 문제만 이 아니고 하느님의 구체적인 상에 기반하고 있다. 하느님이 사랑이라면 우리는 이웃 사랑을 통해서 하느님을 알고 사랑할 수 있다. 이 사랑의 계명은 그리스도교 신앙 그리고 사랑인 하느님에 대한 모든 믿음의 중심에 있다.

 

그런데 여기서 사랑과의 관계에 다른 문제가 발생한다. 어떻게 누군가를 사랑하도록 명령할 수 있는가? 이미 우리는 사랑이 통제될 수 없음을 살펴보았다. 원하기 때문에 또는 원하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 사랑은 ‘맹목적인 열정’이다. 감정을 명령할 수는 없다. 사랑은 가고 오며, 시작하고 끝나는 것이어서 우리가 사랑을 ‘통제’할 수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사랑하라는 계명을 줄 수 있는가? 이 사랑의 계명은 단지 우리가 사랑을 열정이나 감정보다 더 넓은 의미에서 이해할 때만이 의미를 지닌다. 정서 전통에서는 사랑을 말하기 위해 두 가지의 그리스어, 즉 ‘에로스’와 ‘아가페’라는 말을 쓴다. 어의적 논의를 하지 않더라도 에로스는 사랑하는 이에게 느끼는 감정이나 열정으로 본 사랑을 가리킴을 알 수 있다. ‘아가페’라는 말은 성서에서 대개 자비(caridade)로 번역되었다. 이때 자비는 ‘자선을 베풀거나’ 동냥을 준다는 의미가 아니라 무엇인가를 필요로 하는 이들과 연대한다는 본원적 의미를 말한다. 열정으로 본 사랑이나 연대로 본 사랑은 같은 구조를 갖는다. 즉 다른 이에게 마음을 열고 다른 이에 게 귀 기울이며 다른 이의 말을 믿는다.

 

열정으로 본 사랑과 연대로 본 사랑 사이의 커다란 차이는 열정적 사랑의 경우에는 사랑이 각자의 의지에 의존하지 생겨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나는 사랑에 마음을 열었으나 그렇다고 나의 단순한 의지로 누군가를 사랑할 수 없다. 마음속으로 ‘이 여자를 사랑하자’고 되뇌어 보았자 소용이 없고 자연스럽게 사랑이 ‘일어날’ 필요가 있다. 열정이나 감정이 아닌 연대로 본 사랑은 삶의 자세다. 삶은 선택의 열매다. 즉 다른 사람에게 나를 열어 보일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여기서 다른 사람이란 단지 ‘내’ 친구, ‘내’ 친척 등 ‘내’자가 붙은 사람들만을 의미하지 않고, 더 정확하게 말하면, 다른 사람이란 결코 ‘내’자가 붙지 않는 사람들을 말한다. 다른 사람들에게 마음을 열고 그들을 존중하는 태도는 각자가 어떤 세계관을 갖는가에 달려있다. 다른 이에게 자신을 여는 사람의 삶은 자기 안에 닫혀 있는 사람의 삶이나 가치와 근본적으로 다르다. 열 것인가 그렇지 않을 것인가의 선택은 우리 삶에 있어 기본적이다. 이 선택의 뒤에는 인간적 자아실현의 문제가 있다. 사람은 자기에게 닫혀 있는 상태로 자기를 절대화하면서 자아를 실현할 수 있는가? 아니면 다른 사람에 대한 사랑에 마음을 엶으로써 실현할 수 있는가? 내 스스로를 절대화하면 내 취향이나 자기중심주의에서만 내 자아의 실현을 추구하고 다른 사람이나 하느님을 알 수 없다. 다른 사람이나 하느님을 부인하면서 나는 절대적이 되고 신이된다. 이에 반해 다른 사람을 인정하고 다른 사람에 대한 사랑에 자신을 열 때 나는 스스로를 신이나 절대적이 아닌 존재로 인정할 수 있다.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마음을 열고 다른 사람과 연대하는 이 관계를 연대적 사랑이라 부를 수 있다.

 

이제 사랑의 계명이 보다 명백해졌다.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은 이웃에 자신을 열고 연대하라는 뜻이다. 이웃을 사랑한다 함은 이웃의 행복에 함께 연대하고 기뻐하는 정신으로 시기와 경쟁과 ‘받으면서 주는 정신’을 극복함을 뜻한다.

 

하느님은 단지 열정으로 본 사랑일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모든 이와 함께 하는 연대로 본 사랑이고 따라서 열정과 연대를 동시에 아우르는 사랑이다. 왜냐하면 오직 하느님만이 연대적 의미에서 모든 이를 사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사랑에서, 즉 열정으로 본 사랑에서 그리고 주로 이웃(다른 사람)과 함께하는 연대로 본 사랑에서 하느님을 체험할 수 있다. 우리는 ‘모든 인류를 사랑하라’는 공허한 구호가 아니라 구체적인 인간과 함께하는 연대적 사랑에서 하느님을 체험할 수 있다. 우리는 ‘모든 이를 사랑한다’는 아름다운 문장으로 연대의 구체성을 결핍할 위험이 있다. 우리가 ‘모든 이’를 실체적인 개인이나 집단으로 구체화하지 않으면 이 모든 이가 ‘아무’도 의미하지 않을 수 있다. 인간에게 어려운 것은 모든 이를 사랑하는 일이 아니라 각각의 사람을 사랑하는 일이다.

 

성인, 신비가 그리고 하느님을 진정으로 사랑한 모든 이들은 다른 사람에 대한 크나큰 사랑이라는 공통적 특징을 지닌다. 성 요한이 그의 공동체에 보낸 편지 한 구절로 이 장을 끝낸다.

 

사랑하는 여러분에게 당부합니다. 우리는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나 하느님께로 부터 났으며 하느님은 압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1요한 4,7-8).

 

우리의 신앙생활을 통해 성서 말씀을 살아내는 것은 예수님을 닮아 육화의 사랑을 실천하는 길이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그 하느님의 사랑은 역사적 인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서만 확인하고 체험할 수 있다. 그리하여 인간도 하느님처럼 서로 사랑할 때만이, 하느님의 사랑을 세상에 표현할 수 있다. 사랑만이 사람을 사람답게 만든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그 간절한 사랑을 이렇게 표현했다. “사랑의 주여! 당신을 알기 위하여 당신을 사랑하게 하여 주시고, 당신을 사랑하기 위하여 당신을 알게 해주소서.” 사도 바오로도 “당신을 사랑하는 것 이외에는 세상 모든 것을 쓰레기같이 내다 버리게 하소서.” 필요하고 요긴한 것은 오직 한 가지, 당신에 대한 사랑을 알고 받는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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