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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4강

하느님 체험, 인간 체험 그리고 사랑 체험

한국계 브라질 신학자 성성모가 쓴『하느님 체험, 환상인가 현실인가』(가톨릭출판사 1994)를 읽고 든 생각들이다. 우리는 단지 믿음, 희망, 사랑의 덕을 닦으며 내기를 거는 식으로 하느님 체험을 할 수 있다. 이와 비슷하게 누군가를 사랑할 때, 나의 사랑과 동등하게 그 상대방이 나를 사랑하고 있다고 확신을 할 수 있을까? 이 책의 내용을 전달한다.

 

누군가 내게 “너를 사랑한다”고 말할 때 우리는 그게 사실인지에 대해 절대적 확실성이나 결정적 증거를 가질 수 없다. 다시 말해 우리는 그 말이 참 이거나 거짓임을 보여주는 것 같은 징표를 찾을 수 있으나 절대적 확신은 가질 수 없다. 우리는 영원한 사랑을 약속하는 사람의 말을 믿거나 아니면 믿지 않을 뿐이다. 믿으면 우리는 이 사랑에 우리의 미래를 건다. 그리고 함께 살아가면서 그 사람이 이 믿음이나 신뢰받을 만한가 그렇지 않은가를 알 수 있다. 모든 여자가 영원한 사랑을 맹세하는 모든 남자를 다 믿겠는가? 물론 모든 남자를 믿지 않는다는 것이 아무도 믿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처럼 하느님을 알려고 하는 우리 모험도 마찬가지다. 믿음이나 내기를 걸 만한 가치가 없는 종교적 약속이 많이 있다. 따라서 생명의 하느님에 대한 우리의 믿음과 내기를 토대 지을 수 있는 구체적 표징을 발견할 필요가 있다.

 

누군가를 안다는 것은 그저 단순히 존재하기만 하는 여기 있는 의자가 어떤 것인가?를 아는 것과 이외는 다르다. 한 인간이 누구인가 어떻게 사는가 하는 실존의 그 모든 것을 알아가기 위한 그와 함께 살면서 사람을 사랑하면서 알 수 없었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치 사람의 마음이란 사랑으로 그 사람 마음속에 들어가 보아야 한다, 나는 너라는 인간을 안다는 것도 그 일부 부분적으로 내가 아는 만큼만 알고 싶은 것만 안다. 알고 듣기 위해서는 다른 이의 마음을 얻도록 사랑하고 자기 자신을 열어서 상대방을 사랑의 대상자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나 다른 이를 알기 위해 자신을 개방하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 상대방이 자신을 드러내고자 하고 또한 그 사람과 서로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의사소통이 이뤄져야 한다. 어떤 사람에게 느닷없이 "당신은 누구요?”라고 물으면 입을 열지 않는다. 이 경우에는 상대방의 이름조차 알기 힘들 것이다. 또한 상대방이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로 대답하면 그가 내게 열린 자세를 갖고 있을지라도 그 결과는 같을 것이다. 이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는 외국어일 수도 있다. 사실상 의사소통이 이뤄지지 않고 따라서 서로를 드러냄도 없다. 서로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말할 때 비로소 쌍방간에 의사소통이 이루어지고 서로를 풍요롭게 한다. 언어는 반드시 말로만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몸짓이나 그 밖의 다른 형태의 의사소통이라도 좋다. 또한 상대방이 드러낸 새로운 사실을 인식하기 위해서는 과거의 축적된 경험으로 그와 비슷하거나 같은 종류의 사실을 미리 알고 있을 필요가 있다.

 

나의 개방, 상대방의 드러냄 그리고 나와 상대방 사이의 믿음은 우리가 알고 만나는 과정의 기본적 구조이다. 그러면 하느님은 어떤가? 하느님을 알고 체험하는 과정도 이럴까? 아마 그럴 것이다.

 

우리는 다만 ‘도약’에서, 우리의 한계를 초월하는 희망과 믿음의 행위에서 하느님을 알 수 있다고 앞장에서 말한 바 있다. 이것은 우리가 다른 이에 대한 개방에 관하여 살펴보았던 것과 같은 것이다. 사람일 뿐인 상대방은 마주할 수 있지만, 하느님은 이와 달리 볼 수 없다. 그래서 보다 근본적인 다른 형태의 개방이 필요하다.

 

이 밖에도 하느님은 어떤 언어로 우리에게 자신을 드러내는가 하는 문제가 남아 있다. 만일 그 언어가 신적 언어라면 우리는 그를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또한 천사들의 언어라면 그 역시 우리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온갖 인간적 한계를 갖는 인간 언어일 때만 우리는 하느님 신비의 계시를 이해할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은 인간이 아니고 신이다. 이 말은 하느님이 자신을 계시할 때에 쓰는 인간 언어는 하느님이 의사소통을 하기 위한 도구일 수 있지만 그와 동시에 그 인간 언어가 하느님의 신비를 다 드러내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즉 인간 언어는 하느님이 우리와 의사소통하기 위해 가능한 유일한 언어이지만 하느님의 모든 진실을 드러내기에는 무척 제한되어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인간 언어가 하느님의 모든 신비를 드러낸다는 환상에 빠지게 되면 우리는 하느님의 계시를 이해하지 못한다.

 

드러냄과 동시에 감추는 이 계시를 좀 더 잘 이해하기 위해 이야기를 하나 들어 보자. 다섯 명의 맹인이 코끼리가 어떻게 생겼는가 알기 위해 동물원에 갔다. 그들은 볼 수 없기 때문에 각자 손으로 만져서 코끼리를 알려고 했다. 첫 번째 맹인은 코끼리의 다리를 만졌고, 두 번째 맹인은 배를, 세 번째 맹인은 코를, 네 번째 맹인은 꼬리를 그리고 마지막 맹인은 코끼리의 귀를 만졌다. 그들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가자 자기가 알게 된 코끼리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첫 번째 맹인이 코끼리가 신전의 원형 기둥과 비슷하게 생겼다는 사실에 놀랐다고 말하자, 두 번째 맹인이 코끼리는 위아래가 좁고 가운데가 불룩 나 온 술통처럼 생겼다고 반박하고 나섰다. 세 번째 맹인은 두 사람의 무지를 비웃으면서 코끼리는 물 호스와 같다고 설명했다. 그러자 네 번째 맹인이 나서서 말채찍과 같다고 주장했고, 마지막으로 다섯 번째 맹인은 코끼리가 커다란 부채와 같다고 전문가적 어조까지 띠면서 이야기했다. 각자 자기의 진실을 증명하려고 했으나 돌아오는 길 내내 이야기가 겉돌았다.

 

이것은 진리가 무엇인가에 대한 동양 우화이다. 우리가 진리의 일부만 알 때 그것은 잘못 안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진리를 다 안 것도 아니다. 즉 우리는 진리의 일부만을 알았을 뿐이다. 그러나 우리가 진리의 일부와 진리 전체를 혼동한다면 우리는 잘못 안 셈이 된다. 하느님의 계시도 이와 같다. 우리는 인간 언어로 하느님 신비의 일부는 알 수 있어도 결코 그 전체를 알 수 없다. 그래서 하느님은 드러냄과 동시에 숨긴다. 여기서 지혜로운 사람은 단지 하느님을 표현하는 인간 언어가 하느님의 한 부분을 드러냈을 뿐이라는 사실을 인지하고 그것을 하느님 전체와 혼동하지 않는다.

 

하느님이 자신을 드러내는 데 쓰는 인간적 언어와 형태로는 어떤 것이 있는가? 어떤 것이 하느님 체험을 가능하게 하는 인간 체험인가? 다시 말하면 어떤 종류의 인간 체험이 하느님을 알기 위해 가장 적절한 체험인가? 또는 인간 언어의 어떤 단어가 하느님을 가리키기 위해 가장 적절한가? 그러나 이 문제에 답하기 전에 우리 시도가 갖는 한계를 절대 잊지 말도록 하자. 여러 시도 가운데에서 개장 널리 알려졌고 또한 내가 가장 만족해하는 것은 ‘하느님은 사랑이다’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정의도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그것은 ‘하느님’이라 는 말 때문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말 때문이다. 우리 사이에서 사랑이라는 말은 수많은 뜻을 지니고 있다. 사랑을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이들은 사랑을 ‘팔고’, 다른 이들은 사랑의 이름으로 사람을 죽이고, 어떤 남자들은 자기 애인에게 ‘사랑의 중거’를 요구하기도 하고, 그리고 많은 이들이 더 이상 사랑을 믿지 않는다고 말한다. 결국, 사랑이란 무엇인가? 오늘날 세계에서 사용되고 있는 사랑의 모든 의미를 찾아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어쩌면 위대한 신비가들이나 하느님을 체험했던 사람들이 하느님이 사랑이라고 지칭했을 때 쓴 사랑이란 말의 의미를 따져 보는 게 때 흥미로운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또한 쉽지 않고 수많은 문헌을 뒤적거리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가 제향하는 바도 아니다. 그럼 하느님에 대한 보다 적절한 정의가 있는지 보기 위해 무엇이 사랑인가를 살펴보자.

사랑이란 것을 인간 체험을 통하여 알아본다. 포르투갈어에는 ‘사랑하다’(armar)와 ‘좋아하다’(gostar)라는 말이 있는데 이는 서로 다른 두 가지 감정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예를 들어 프랑스어에는 이 두 가지 서로 다른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단지 ‘aimer’라는 단어 하나가 있을 뿐이다. 사랑하는 것과 좋아하는 것의 차이는 무엇인가? 이 차이를 살펴보는 것은 사랑이 무엇인가를 알기 위한 좋은 방도이다.

나는 사물을 좋아하고 또한 사람도 좋아한다. 사람들은 흔히 무엇무엇 때문에 누구를 좋아한다고 말한다. 즉 좋아하는 데에는 동기가 있다. 나는 요한을 좋아한다. 왜냐하면 그는 정이 많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나는 슈하스코(churrasco, 브라질식 불고기)를 좋아한다. 왜냐하면 맛이 아주 특별하기 때문이다. 내 취향이 바뀌거나 내가 좋아하는 사물이나 사람의 특성이 없어지거나 바뀔 때 나는 더 이상 그것을 좋아하지 않게 된다. 여기서 기준이 되는 것은 항상 나의 취향이거나 나이다.

 

그렇다면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어떠한가? “당신은 왜 당신의 부인을 사랑합니까?” “왜냐구요? 글쎄요…, 잘 모르겠는데요!” 이렇듯 사랑에서 불분명한 동기를 설명하기 위해 우리는 흔히 “사랑은 맹목적이다”라고 말한다. 사랑이 명목적인 것은 바로 명확한 동기가 없어서다. 명확한 동기는 논리나 이성이 있다는 걸 말한다. 그래서 옛날 철학자들은 이성을 빛으로 표현했다. 그런데 맹목은 빛의 부재, 이성의 부재, 명확한 동기의 부재이다. 사랑은 이런 것이다. 사람들은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고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한다.

 

사랑할 때, 나는 사랑하는 사람에게로 가기 위해 내 세계(내 취향, 내 바람 또는 나 자신)의 경계를 뛰어넘는다. 즉, 초월을 체험한다. 이는 내가 내 취향, 내 바람 또는 내 세계를 버린다는 뜻이 아니라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서 이 모든 것이 상대화된다는 뜻이다. ‘나’에서 사랑하는 사람과의 관계로 기준이 옮겨 감을 말한다.

 

내가 사랑하는 이를 위해 어떤 것을 하는 이유는 내가 좋아 힘을 하기 때문이라기보다는 내가 그 일을 함으로써 사랑하는 이가 기뻐하고 그 기쁨이 나를 흡족하게 하기 때문이다. 이게 사람이다. ‘거저 주고받음’(무상성)의 체험이 사람이다. 보상이나 대가를 받기 위한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사랑하는 이와 함께 누럴 수 있는 기쁨을 위한 사랑이 참사람이다. 사랑의 대가로 받을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있다면 사람뿐이다. 주고받음에 기반한 우리 사회의 일반적 사고 방식과는 정반대다. 사람들은 흔히 숨은 의도를 갖거나 대가를 바라면서 행동한다. 이는 우리 사회의 일부 부패한 정치인들이 즐겨 쓰는 ‘받으면서 준다’라는 뒤틀린 사고방식이다. 사랑은 그렇지 않다. 사람은 거저 주고받음이다. 부부 사이에 “나는 당신을 위해 이것을 했는데 당신은 나를 위해 무엇을 했는가?”라고 따지고 드는 것도 이미 사랑이 일상적인 생활에 묻혀 식어 버렸기 때문이다.

 

우리는 마음을 열고(초월의 체험) 사랑의 거저 줌을 체험함으로써 자신을 변화시키고 자신의 삶을 살찌운다. 이혼녀인 한 여자 친구가 언젠가 “다시 결혼하여 남편을 얻고 싶지 않지만 이젠 정말 사랑을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사귀고, 삶을 채워 나가고 싶다”고 말한 적이 있다. 이미 사랑을 한 번 체험한 사람은 사랑이 없을 때에 오는 공허감을 잘 안다. 사랑은 근본적 인간 체험으로 우리를 사람답게 만들고 우리 삶에 새로운 의미를 준다. 가끔 발생하는 일이지만, 불행히 응답받지 못하는 사랑까지도 의미가 있다. 우리는 사랑을 통해 우리 삶의 의미가 우리 자신에게 있지 않고 사랑이나 사랑하는 이에게 자기 자신을 개방하는 일에 있음을 발견한다. 우리는 또한 이 엶에서 인간 관계의 보다 나은 형태는 교환이 아니라 거저 주고받음임을 발견한다. 그것은 사랑을 위해 우리 자신을 바칠 때 느끼는 알 수 없는 기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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