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제 13강

완덕의 삶 - 그리스도교 신앙생활의 정체성

우리 그리스도교 신앙생활의 정체성은 한마디로, 하느님이시자 인간이신 역사적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발원한다. 다시 말해 우리 신앙생활은 이 세상에서 우리와 함께 하느님 나라를 살러 오신 예수님의 삶을 뒤쫓아가는 데 있다는 말이다.

 

예수님께서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완전하심같이 우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달라고 주문하셨다. 인간의 자기완성, 곧 완덕의 삶을 살아가라는 말씀이시다. 어떻게 그 완덕의 삶을 살아갈 것인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성화(聖化) 은총이 있다. 이 은총의 바탕에는 믿음, 희망, 사랑이 있다. 그것이 신앙생활의 정체성의 내용을 구성한다.

 

십자가상 죽음에 이르기까지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따랐던 예수님, 제자들에게 참된 행복을 말씀하시면서, 그 말씀 그대로 살아가셨다. 진복팔단의 삶은 완덕의 삶이다. 그것이 아버지의 뜻을 이 세상에서 실천하는 삶이다.

 

사도 바오로는 ‘이제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성령으로서 그리스도께서 살아가신다’라고 했다. 내 안에 성령이 꿈틀거리며, 하느님 말씀과 예수님의 삶을 살아가도록 늘 깨어 기도하며 성화 은총을 청해야겠다. 창세기 말씀을 자주 인용하지만, 인간 창조의 목적도 바로 하느님 모상의 삶, 우리 스스로 하느님이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바로 신화(神化)의 삶이 창조 목적에 따르는 삶이다. 이는 앞서 언급한 예수님 말씀, 곧 하느님 아버지의 완전함 그대로 우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지상명령이다.

 

하느님 모상대로 살아가야 할 인간의 운명, 그 모범은 바로 하느님이 직접 보여주셨다. ‘임마누엘’,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며 그 길을 보여주신 것이다. 인간이 되신 하느님, 역사적 예수님에게서 우리는 창조 목적의 길을 보게 된다. 예수님의 삶은 우리 그리스도교 신앙 정체성의 원천이다. 예수님과 함께 살아간 인류는 하느님 나라를 이미 체험했다. 영원한 삶을 살아갈 하느님 나라, 가까이 있다. 다만 우리가 그 나라를 보지 못하고, 살아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애주애인(愛主愛人), 곧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사랑하라, 말씀하시면서 하느님 나라 삶을 일러주셨다. 그 길이 참된 행복과 구원에 이르는 핵심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쉽게 실천하지 못하고 있다.

 

사도 바오로는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고, 그저 울리는 괭과리 소리일 뿐이고, 내가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 이익이라 말씀하신 그 의미와 내용도 같은 맥락이다. 한편 우리 신앙생활 정체성은 바로 하느님의 성화 은총과 도움의 은총을 구하는 지속적인 기도 생활이 필요하다. 하느님의 말씀이 담긴 성경을 묵상하고, 그 말씀을 우리 일상생활로 옮겨가는 것 또한 중요하다.

 

절멸의 수용소, 지옥과도 같은 죽음의 수용소에서도 인간의 존귀함과 희망을 끈을 놓지 않았던 빅터 프랑클의 체험담은 큰 교훈을 준다. 또 우리 한국 순교자들은 그 엄혹한 박해시대에도 행복한 신앙생활을 이어갔다. 그들 모두 하느님 나라는 빵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으로 살아가며,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 그것을 내 이웃고 나누는 것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안셀름 그륀의 책 <아래로부터의 영성> 결론 부분을 인용하면서 마무리한다.

 

우리 피정의 집에서 피정하는 사람들을 아래로부터의 영성으로 지도하면, 그들은 이 영성에 의해 상당한 자유와 치유를 경험한다. 그러나 그들은 또한 지금까지 추구해 온 위로부터의 영성에 의해 압박받고 때로는 병들게 되는 것을 경험하기도 한다. 그러면 우리는 그들에게 지금까지 추구해 온 위로부터의 영성이 본래 좋은 것이란 사실을 주지시키려고 거듭 시도한다. 위로부터의 영성은 그들로 하여금 매우 강하게, 열심히 수행해 나갈 것을 강요했다. 이것을 회화적으로 표현하면, 위로부터의 영성은 한 마음씨 나쁜 사람이 싱싱하고 아름다운 야자수가 더 이상 자라지 못하도록 그 야자수 위에 올려놓은 장애물과도 같다. 그런 일을 저지른 몇 년 후에 그가 그곳에 다시 와 보니 그 야자수는 그 지역에서 가장 훌륭하게 잘 자라 있었다. 그 야자수는 그 장애물 때문에 뿌리를 더욱더 깊이 박으며 성장을 계속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의 이상적 요소들은 자주 우리가 뿌리를 더욱더 깊이 뻗어 나가도록 강요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에게 지도받는 사람들은 그들의 머리 위에 있는 그 길을 계속 가는 것은 그들에게 해로움을 가져올 수도 있다는 것을 느낀다. 늦어도 삶의 중반기를 지나기 이전에 이와는 반대쪽의 축인 아래로부터의 영성을 이해하도록 시도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이제 이들은 하느님의 음성을 그들 자신의 마음과 그들 삶의 고통에서, 그들의 느낌과 꿈 안에서, 그들의 육체 안에서 듣고 이해하여 실천해 나가는 용기를 가져야 한다. 이제 이들은 자신들을 꽉 조여 압박하는 옷을 벗어버려야 한다. 그렇게 할 때, 하느님께서 그들 안에 만들어놓으신 그들의 원래 모습을 꽃피워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우리에게 피정지도를 받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지금까지 수행해 온 자기 수련과 이상적 요소들은 그들에게 이제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자신의 무능함을 인식하도록 하여 자신을 온전히 하느님께 내어드리고 하느님 안에 머물도록 했으므로, 그것이 그들에게 충분히 의미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것이 또한 우리 과제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위로부터의 영성 없이는 그들이 그렇게 쉽게 막다른 골목으로 접어들지는 못했을 것이다. 만약 누군가가 막다른 골목에서 자신에게 채찍질을 가하면서 힘으로 그곳을 통과하려고 시도한다면 그것은 매우 슬픈 일이 된다. 그렇게 될 때, 그것은 머리로 벽을 들이받는 것과 같아 피를 흘릴 것이며, 정말 많은 피를 흘리는 지경에까지 이를지도 모른다.

막다른 길, 자신의 무능을 인식한 상황에서 우리는 더 이상 투쟁하는 것을 그만두어야 한다. 그곳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하느님께서 우리의 목소리를 듣고 우리의 무능함에서 구출해 주실 때까지 소리 높여 외쳐대는 것뿐이다. 만약 우리가 무능함과 화해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하느님을 참으로 만나게 되는 장소가 된다. 그렇게 될 때, 우리는 빈손으로, 지친 몸으로, 온 몸이 긁히고 다친 상태로, 우리를 구원하고 자유롭게 하는 하느님을 만나게 된다. 그러면 우리는 두 팔을 들고 항복하게 되며, 우리의 무능 저 밑바닥에서 하느님의 능력에 가득 찬 은총과 사랑을 체험하게 된다. 우리는 막다른 상태에 접해서야,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을 더 나은 존재로 상승시키려고 하는 것을 포기한 그곳에서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을 참으로 올바르게 이해하게 된다. 바로 그곳에서 우리는 사도 바울로가 이해한 것과 같이 하느님의 은총이 참으로 무엇인가에 대하여 이해하게 되며, 하느님의 은총은 우리의 연약함 속에서 우리를 완전에로 이끌어가는 존재라는 것을 이해하게 된다.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의 연약함, 좌절, 실의, 절망과 무능에도 불구하고 우리 인간을 완성으로 이끌어 가시려 한다. 그 사랑의 전능을 깨닫는 것이 완덕에 이르는 첫걸음이다. 사도 바오로는 인간의 자기완성, 완덕을 닦는 일을 마치 경기에서 최후 승리를 쟁취하는 이들의 어려움에 비유하고 있다.

 

경기장에서 달리기하는 이들이 모두 달리지만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뿐이라는 것을 여러분은 모릅니까? 이와 같이 여러분도 상을 받을 수 있도록 달리십시오. 모든 경기자는 모든 일에 절제를 합니다. 그들은 썩어 없어질 화관을 얻으려고 그렇게 하지만, 우리는 썩지 않는 화관을 얻으려고 하는 것입니다(1코린 9,24-25).

© 2023 by Train of Thoughts. Proudly created with Wix.com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