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제 12강

왜 사냐고요? 사랑하기 위해서!

헨리는 프레드를 비롯하여 주위의 모든 사람을 사랑했고, 하느님의 사랑은 헨리 자신의 사랑보다 훨씬 더 크고 믿을 만하며 관대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사실 헨리의 영성 대부분 가없는 하느님 사랑을 체험함으로써 형성된 것입니다. 어떤 믿음을 가지고 있고, 또 하느님에 대해 어떻게 알고 있든 상관없이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는 커다란 사랑입니다. 헨리 자신의 상처로 인해 그 누구보다도 사랑받음에 대한 이끌림이 컸을 것입니다. 그는 어떤 잘못과 결점에도 불구하고 하느님 아버지께 이 사랑을 청할 수 있다는 확신을 얻자, 다른 사람들과도 이 축복을 함께 나누게 되기를 간절히 바랐습니다. 그것은 마치 높은 산 정상에 오른 것과 같았습니다. 헨리는 일단 산꼭대기에 오르자, 능선으로 이어진 다른 산꼭대기에도 쉽게 이를 수 있는 위치에 자신이 서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아래를 내려다보며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과 만물과 모든 사람이 일치를 이루는 새로운 그림을 그려 보았습니다. 지위가 높은 사람, 비천한 사람, 세속적인 사람, 냉소적인 사람, 상처가 깊은 사람··· 그 누구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모든 탕자는 하느님의 축복을 받기 위해 앞으로 불려 나왔습니다.

 

과거 그리스도교에서는 발견할 수 없는 아름답고 담대한 묵상입니다. 헨리는 세례 때 ‘그리스도를 입는 것’에 대해 언급하는 성경 구절들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합니다. 오래전에 그는 안톤 보이슨에게서 사람의 약점은 오히려 강점과 영감이 될 수 있음을 배웠습니다. 이제 헨리는 약함과 겸손이 예수 그리스도 삶의 본질이었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너무나 연약하게 태어나셨고 무력하게 돌아가셨습니다. 아래로 내려가시는 그리스도는 결국 우리와 마찬가지로 나약하고 인간적인 존재입니다.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인간적) 상황에 동참하심으로써 우리도 그분의 (하느님적) 지위에 동참할 수 있게 되었음을 합니다. 그런데 아래로 내려가는 그리스도의 길이 바로 우리 자신의 본질에 이르는 지름길임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그리스도의 삶과 우리 자신의 삶은 그다지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 데 우리는 그리스도와 우리 사이에는 엄청난 간극이 있고, 그분이 살고 죽으신 길과 우리의 길은 다르다고 잘못 알고 있습니다. 헨리 나웬이 마지막 안식년 동안 쓴 두 권의 책에 이런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그중 한 권인 『여정을 위한 빵』(Bread for the Journey)은 ‘예수처럼 되기’, ‘예수의 신원을 말하기’, ‘그리스도를 입기’와 같은 항목을 통해 성찰과 가르침으로 인도하는 일기 형식의 책입니다. 헨리는 예수와 하느님 아버지께서 같은 성령으로 숨을 쉬시면서 그 성령을 우리에게도 주셨다고 설명합니다. 똑같은 성령께서 우리를 완전한 변화로 이끄시고,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살아 계시다 는 사실을 깨닫게 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에 살아 있는 그리스도입니다. 강생하신 하느님이신 예수는 우리의 몸을 통해 거듭하여 당신을 드러내십니다. 실로 참된 구원은 그리스도가 되는 데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에 살아 있는 그리스도입니다.” 목사, 사제, 선교사, 수녀, 수도승이 아닌 평범한 사람들, 특별한 업적도 드러나는 선행도 대단한 믿음도 없는 사람들에게 헨리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에게 손 내밀고 계시며, 당신의 삶과 죽음은 모든 인간에게 공통적인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통찰력은 꽃을 피웠다가는 시들어 버리고 땅에 떨어져 죽습니다. 그리고 후일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다시 살아납니다. 해바라기 꽃잎은 기도하듯 고개 숙인 채 하얀 눈으로 만든 왕관을 쓰고 있습니다. 잠들어 있는 성령이 곧 깨어날 것만 같습니다. 사진 밑에는 주타가 연필로 쓴 글이 보입니다.

 

··· 그리고 웃는 얼굴 위에

봄의 꿈을 입고

들판에서 잠자고 있는

겨울

 

해바라기가 불침번을 서듯이 성서에서 깨어 있는 지혜롭고 슬기로운 정녀 다섯같이 우리 모두 헨리 나웬 신부의 저서 아래로부터 영성 신앙생활로 하느님이 우리 각자 자신을 창조하신 아버지 뜻대로 우리 자신이 됨으로써 자기 안에 살아계신 하느님을 만나 임마누엘 하느님과 함께 이 세상에서 하느님 나라를 살아 나아가십시다.

 

인간은 왜 사는가?

 

프랑스 피에르 신부는 인간은 왜 사는가?에 대하여 이렇게 해답을 합니다.

 

사람들은 내게 자주 묻습니다. 삶의 목적이 무엇이냐고.

 

수련 수사 시절에는 경애하는 하느님을 만나고부터 삶의 그 모든 부조리에도 불구하고 내 안에는 하나의 확신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때로는 내면적인 동요를 느끼고 정신적인 혼란을 겪을 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마음과 믿음에서 우러나오는 신념을 가지고 나는 대답합니다. 삶의 목적은 바로 사랑하는 법을 배우는 데 있다고,

 

사랑한다는 것은 타인인 당신이 행복해야 나도 행복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타인인 당신이 불행하고 괴로우면 나도 아픈 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사랑이란 이처럼 지극히 단순한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말합니다. 삶이란 사랑하는 법을 배우기 위해서, 그리고 확신을 가지고 악에 대항하여 싸우기 위해서, 우리의 자유에 맡겨진 짧은 순간이라고.

 

창조의 의미는 사랑이 사랑에 응답하는 데 있습니다. 두 개의 자유가 서로를 위해 자신을 바치고 서로를 사랑하는 절정(絶頂)이 없다면, 모든 창조는 무의미합니다.

 

김형영 시인은 자신의 일생을 ‘헛것을 따라다니다’(전문) 시 내용입니다.

 

나는 내가 누군지 모르고 산다.

내가 꽃인데

꽃을 찾아다니는가 하면, 내가 바람인데

한 발짝도 나를 떠나지 못하고

스스로 울안에 갇혀 산다.

 

내가 만물과 함께 주인인데

이리 기웃

저리 기웃

한평생도 모자란 듯 기웃거리다가

나를 바로 보지 못하고

나는 나를 떠나 떠돌아다닌다.

 

내가 나무이고

내가 꽃이고

내가 향기인데

끝내 나는 내가 누군지 모르고

헛것을 따라다니다

그만 헛것이 되어 떠돌아다닌다.

 

나 없는 내가 되어 떠돌아다닌다.

 

 

도시 인간이 무엇이길래 이렇게 헛것을 따라다니어도 되는 것인가요? 창세기는 창조주 하느님의 모습대로 만들어진 인간의 창조를 전해줍니다. 이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의 완전하심같이 우리도 완전한 사람이 되라는 창조의 지상명령입니다. 이는 또한 당신이 창조하신 온 우주와 세상만물을 창조주 하느님을 대리해, 창조의 목적에 적합하게 대하라는 사명과 운명입니다. 하느님이 창조하신 우주의 광대무변함은 우리 인간 상상을 초월한다. 경희대 어느 천문학 교수의 말에 의하면, 온 우주의 크기는 숫자로 표현하자면 10에 10400승분의 1이 우리 인간 실존이라고 합니다. 즉 10이란 숫자에 0을 뒤에 10400개를 더한 분모 중 1개의 분자로서 인간 실존이라는 것이지요. 어렵고 상상이 되지 않습니다. 아무튼 광대무변의 우주이고 그 안에 사는 인간이라는 정도로 정리합니다. 그 교수의 말대로 ‘가히 기절초풍할 지경’입니다.

 

한편 만물의 영장인 인간 생명은 하느님 창조의 최고 걸작품으로, 기적으로밖에 이해할 길이 없다고 합니다(안병욱, 『삶의 완성을 향하여 』, 38-41쪽 참조).

 

그 기적을 생명의 탄생과정으로 바라봅니다. 남녀가 관계할 때, 일 회분의 정액 속에 약 3~5억 마리의 정자가 배출되는데, 오직 하나의 정자만이 난자를 만나 생명이 된다고 합니다. 그것도 몇 번의 관계 속에서 임신이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여성의 난자는 30만 개가 넘는다고 합니다. 그중에서 가장 한 난자가 선택되어 배란됩니다. 여자는 평생 초경에서 폐경 때까지 약 400개월에 걸쳐 400개의 난자가 배란되는데, 그중에서 불과 몇 개의 난자만이 정자를 만나 생명이 만들어집니다. 인간이 이 세상에 태어나는 확률은 수천억분의 일에 지나지 않습니다. 생명으로 태어나기 위한 거룩하고도 무서운 싸움에서, 수억의 정자 중 살아남은 그것으로 인해 생명이 만들어졌다는 의미에서 하나의 승리이기도 합니다. 생명의 탄생은 하나의 운명, 우연, 은총이자 기적입니다. 저 무수한 생명 중에서 오직 한 마리의 정자만이 난자를 만나 생명으로 태어납니다. 나의 생명, 실존에 대해 한없이 감사와 경건의 마음을 지녀야 할 이유입니다.

 

더욱이 우리 그리스도인은 성부-성자-성령 삼위일체 하느님께서 당신 모습대로 사람을 만드셨다고 고백합니다.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된 인간은 소우주(micro cosmos)라고도 합니다. 이러한 인간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완전하심을 드러내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하느님 창조의 목적을 사는 인간 책무입니다. 하느님은 그 무한한 사랑으로 인간되셨습고, 그 사랑의 보답으로 인간은 하느님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인 육화(肉化)와 인간의 신화(神化)입니다. 이레네오 성인부터 동·서방의 교부들이 말한 바와 같이, “신이 인간이 되신 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신이 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Deus homo factus est ut homo fieret Deus)[프랑수아 바리용 신부, 『흔들리지 않은 신앙』, 생활성서(2014) 참조].

 

인간의 자기완성은 운명적을 결정된 사랑의 실존의 자각, 다시 말해 인간의 사랑만이 인간 자기완성에 이르게 합니다. 성서는 창조주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을 얼마나 사랑하시는 존재인지 말해주고 있습니다.

 

온 세상의 주인이신 주님께 드리는 찬양의 문맥에서(시편 8,2.10), 시편 저자는 인간 존재의 특별한 조건을 고려하면서 어안이 벙벙할 정도로 놀라움을 금하지 못한다.

 

“우러러 당신의 하늘을 바라봅니다, 당신 손가락의 작품들을 당신께서 굳건히 세우신 달과 별들을.

인간(’ěnôš)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기억해 주십니까?

사람('사람의 아들' = ben 'ādām)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돌보아 주십니까?

신들보다 조금만 못하게 만드시고

영광과 존귀의 관을 씌워 주셨습니다.

당신 손의 작품들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의 발아래 두셨습니다.

저 모든 양 떼와 소떼

들짐승들하며

하늘의 새들과 바다의 물고기들

물속 길을 다니는 것들입니다”(시편 8,4-9).

 

“인간이 무엇이기에?”라는 질문은 시편 144(143)편 3절에도 나온다. 그렇지만 시편 144(143)편 3절에서 이 질문은 하느님의 구원 개입의 요청(시편 144[143],5-7)으로 인간의 나약함의 동기(시편 144[143],4; 또한 집회 18,7-9 참조)를 소개하지만, 시편 8편에서는 이 질문이 찬양 노래에서 흘러나오는 놀라운 경탄을 형성한다. 하늘의 장엄함과 비교하여 명확히 드러나는 '사람의 아들'의 작음은, 역설적으로 기쁘게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하는 원인이 된다. 기도자는 주님의 ‘헤아려 주심’(직역하면 “방문해 주십니까?”)으로 충만함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분은 보잘것없는 피조물을 '영광과 존귀'로 씌워 주시고, 그에게 하느님의 신분보다 조금 못한 임금의 신분을 부여하심으로써, 인간으로 하여금 땅 위에서 살아 있는 모든 것을 지배하는 ‘힘’을 행사할 수 있게 해 주셨다. 기도자가 그와 같은 엄청난 승리의 표상(시편 110[109],1-3; 113[112],7-8)을 표현한 것은, 자랑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유사한 이적의 주인이신 주님의 이름을 경축하기 위해서다(시편 8,2.10).

 

하느님의 아들이시자, 참 인간이신 역사적 인물 나자렛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만큼 더한 하느님 의 인간 사랑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을 사랑하신 한 인간으로서 이 세상에서 당신 사랑으로서 변화시키시기를 원하시고 바라신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알려주신 분이십니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레스는, “오늘 내가 죽어도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 하지만 내가 살아 있는 한 세상은 바뀐다”라고 했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무르고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십니다”(1요한 4,16). 사랑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그 사랑이 내 안에 불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을까! 나에게 사랑할 용기를! 그밖의 것은 부수적입니다. 교회 내 무수한 성인들은 이 세상을 가장 많이 사랑으로 변화시키시고 성화시킨 분들입니다. 사랑은 우리를 재촉합니다. 사랑의 불을 놓으러 오신 주님께서 오늘도 우리를 사랑으로 부르십니다. 사랑의 불길을 지피기 위해!

© 2023 by Train of Thoughts. Proudly created with Wix.com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