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강
아래로부터의 영성의 형성 - 성경의 예화들
구약성경에 등장하는 위대한 사람들은 먼저 자신의 죄와 무능으로 절망의 심연까지 내려갔던 사람들로서 희망이라고는 오직 하느님의 도우심에 의지하는 것뿐이었다. 그들은 하느님에 의해 완전히 새로운 존재가 되었으며, 하느님께 대한 믿음과 순종으로 지도자 소임을 수행할 수 있었다.
신약성경에서 예수님은 시몬 베드로를 자신이 세운 교회의 반석으로 선택하신다. 그때 베드로는 예수님을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했다. 베드로는 죽음이 기다리는 예루살렘으로 가고 있는 예수님을 가지 못하게 막고 싶어 했다. 예수님님은 그를 사탄이라 칭하면서, 당신 뒤로 물러날 것을 명하셨다(마태 16,23). 베드로는 마침내 폭도들에게 붙잡히신 예수님님을 부인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는 올리브 산으로 올라가는 길에서 “스승님과 함께 죽는 한이 있더라도, 저는 스승님을 모른다고 하지 않겠습니다”(마태 26,35)라고 거창하게 맹세까지 했다. 하지만 그는 스스로를 확실하게 믿을 수 없다는 사실을 먼저 체험해야만 했다. 그는 마침내 예수님을 부인하고 나서 “밖으로 나가 슬피 울었다”(마태 26,75). 복음사가들은 베드로의 잘못을 구차하게 변명하거나 감싸지 않았다. 복음사가들은 예수님이 신심이 깊고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 죄 많고 잘못이 많은 사람들을 사도로 선택한 것을 사실 그대로 보도하는 것이 중요했다. 예수님은 바로 이러한 사람들을 토대로 자신의 교회를 설립했다. 예수님이 당신의 말씀과 죽음을 통하여 하느님의 자비를 훌륭하게 증거한 바와 같이, 이들도 하느님의 자비를 알리는 데에 아주 적합한 사람들이었다. 베드로는 자신의 죄를 통해 다른 사람을 위한 반석이 되었다. 베드로는 그 자신 스스로는 결코 반석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체험했고, 여러 가지 요소들로 얽혀 있는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께 충실하게 머물 수 있기 위해서는 오직 믿음에 자신을 내맡겨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래로부터의 영성에서 새로운 힘을 얻은 바오로
바오로는 바리사이파 출신으로서 위로부터의 영성을 추구한 전형적인 사람이다. 그는 자기 자신에 대하여 이렇게 말한다.
유다교를 신봉하는 일에서도 동족인 내 또래의 많은 사람들보다 앞서 있었고, 내 조상들의 전통을 지키는 일에도 훨씬 더 열심이었습니다(갈라 1,14).
그는 바리사이인들이 추구하던 이상들을 매우 존중했으며, 모든 계명과 율법들을 정확하게 지켰고, 그것을 통해 하느님의 뜻을 채워나가려고 했다. 그러나 그는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서 완전히 땅에 쓰러져 주저앉게 되었으며, 그것과 함께 그가 그때까지 쌓아온 삶의 모든 것들도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땅에 쓰러진 상태에서 그는 아래로부터의 영성과 대면하게 되었다. 그는 무기력한 상태에 있었다. 그러한 상태에서 그는 그리스도께서 몸소 그에게 작용하시고 그를 변화시키시는 것을 체험하게 되었다. 믿음으로만 의화된다는 그의 견해는 바로 이 체험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 사실은 우리가 덕행과 금욕 또는 자기수련을 통해서는 하느님께 도달할 수 없고, 오직 자신의 무능을 인정함으로써 하느님께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이러한 것을 통해 우리는 하느님의 은총에 대하여 좀 더 민감하게 된다. 바오로는 회개한 후 곧장 완전히 건강하고 변화된 사람이 되지는 못했다. 그는 자신을 겸손하게 만드는 어떤 한 병에 시달렸다. 그는 이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 계시들이 엄청난 것이기에 더욱 그렇습니다. 그래서 내가 자만하지 않도록 하느님께서 내 몸에 가시를 주셨습니다. 그것은 사탄의 하수인으로, 나를 줄곧 찔러 대 내가 자만하지 못하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2코린 12,7).
그러나 바오로는 그 병에도 불구하고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일을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 나갔다. 성서학자의 주석에 의하면, 바오로가 지고 가야만 했던 그 병고는 그의 활동력을 약화시키고 그를 겸손하게 했다. 그 병은 그의 회개 이후에도 여전히 남아 있어 신경계통에 어려움을 주었는지도 모른다. 하여간 하느님은 이 병을 이용하여 바울로가 해방과 구원에 대하여 새롭게 파악하도록 했을 것이다. 바오로는 자신의 약점을 오히려 자랑하고 나섰다. 그는 하느님의 은총이 그에게 충분히 작용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는 자신을 괴롭히던 병을 통해 하느님의 은총에 자신을 더 내맡겼으며, 사실 하느님의 은총이 모든 것의 중심이었다. 바오로는 어느 누구보다도 더 많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존재하는 해방을 가져오는 구원에 대하여 선포했다. 이러한 이유들로 하느님은 바오로를 그 병에서 해방시키지 않으셨다. 하느님은 바오로에게 오히려 이렇게 응답하셨다.
너는 내 은총을 넉넉히 받았다. 나의 힘은 약한 데에서 완전히 드러난다(2코린 12,9).
하느님의 힘은 우리의 힘이 약해질수록 오히려 더 강하게 작용한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하느님을 통해 더 강해지는 것, 사람들 앞에 좀 더 훌륭한 존재로 서는 것, 영적 삶을 통해 윤리적으로 더 잘사는 것 등이다. 그러나 우리가 약할 때, 하고자 하는 일을 스스로 잘할 수 없을 때, “사탄으로부터 파견된 악의 세력”이 우리를 죄어들어올 때, 하느님과 하느님의 은혜에 더욱더 마음의 문을 열게 되는 것은 상당히 역설적이다. 그러므로 바오로는 자신의 무능과 약함을 인정하고 받아들였다.
내가 약할 때에 오히려 강하기 때문입니다(2코린 12,10).
그는 자신의 무능과 약함에 의해 자신의 힘으로 하느님께 도달하려는 유혹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는 하느님 품에 자신을 내맡겨 하느님의 은총으로 올바르게 자신을 지탱해 나갈 수 있었다.
예수님의 태도와 말씀에서 우리는 언제나 다시 아래로부터의 영성을 만나게 된다. 예수님은 세리와 죄인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하느님의 사랑에 마음을 열고 있음을 인지認知했기에 의도적으로 그들을 더 가까이했다. 이들과는 달리 정의로운 사람들은 정의롭게 살아가려고 애쓰는 동안 자신의 주변만 맴돌고 자신에게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가 자주 있다. 예수님은 죄인과 연약한 사람들을 자비롭고 부드럽게 대한 반면에 바리사이인들은 매우 강하게 질책하셨다. 바리사이인들은 전형적인 위로부터의 영성을 추구했다. 이들은 많은 장점을 지니고 있었고 자신들의 행위를 통해 하느님의 마음에 들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모든 계명들을 완벽하게 준수하려고 온 힘을 기울이는 행위를 통해 진정으로 하느님을 찾기보다는 자기 자신을 더 찾고 있었던 사실을 완벽하게 실천해 나갈 수 있을 것으로 믿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하느님을 만나는 일이 아니라 정의와 율법들을 지키는 것이었다. 모든 것을 하느님을 위해 하고 싶어한 것은 사실이지만 하느님이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들이 설정한 규칙과 이상들을 지켜나가는 것이었다. 계명들을 지키는 일에 자신들을 얽어매 놓고는 하느님이 인간들에게 참으로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간과해 버린 것이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이러한 사실을 마태오 복음에서 두 번이나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마태 9,13).
예수님은 바리사이인들과 세리들에 대해 말한 것을 통해 위로부터의 영성이 아니라 아래로부터의 영성을 원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드러내고 있다. 왜냐하면 아래로부터의 영성이 사람들의 마음을 하느님께 열도록 하기 때문이다. 얻어맞고, 상처받고, 부서진 마음은 하느님께로 열리게 된다. 자기 자신의 죄가 너무도 커서 스스로의 노력으로는 원상회복을 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기에 하느님의 자비심에 의존하면서 뉘우치는 마음으로 자신의 가슴을 치는 세리가 하느님으로부터 의화되는 것이다(루카 18,9-14).
아래로부터의 영성은 무엇보다 먼저 예수님의 비유들에서 분명히 드러나고 있다. 예수님은 밭에 숨겨진 보물에 대한 비유에서 보물, 즉 하느님이 만들어 놓은 우리의 본 모습을 땅 속에서, 지저분함 속에서 찾을 수 있음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마태 13,44 이하). 만약 우리가 우리 안에 숨은 보물을 찾기를 원한다면 먼저 우리의 손이 지저분해지는 것을 감수하면서 땅을 파야만 한다. 좋은 진주에 대한 비유도 우리에게 아래로부터의 영성의 다른 면을 보여주고 있다. 진주는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뜻하는 하나의 표상表象이다. 진주는 진주조개가 입은 상처에서 자라난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상처를 받아서 아파하고 고심할 때 그 안에서 보물을 찾게 된다. 상처는 우리가 우리 자신을 만나는 장소이기만 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이제 더 이상 나아갈 수도 없고 앞날에 대한 희망이 전혀 보이지 않아서 포기하기 직전에, 그때 우리는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고, 우리가 완전히 그리스도에게 내맡겨져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된다. 그러한 때 구세주와 하늘나라에 대한 관심이 커진다. 그때 우리는 우리의 상처를 어루만져주고 치유해 주는 존재에게 손을 내밀게 된다. 그리스도는 우리가 온 집안을 샅샅이 뒤져야 찾을 수 있는 잃어버린 은전과 같은 존재이다(루카 15,8 이하). 우리는 우리의 가구들을 한쪽으로 치울 때, 그 은전을 찾아낼 수 있다. 우리가 여러 가지 물건들을 잘 갖추어서 집안을 장식해 놓은 것은 우리에게 별 도움이 되지 못한다. 우리가 부주의하여 잃어버린 은전을 다시 찾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하느님께서는 위기상황을 통해 우리 안에 정돈되어 있는 것들을 둘러엎어 엉망이 되게 하신다.
예수님이 아래로부터의 영성을 언급하는 또 하나의 비유는 가라지 비유이다(마태 13,24-30). 위로부터의 영성은 기꺼이 이상적인 요소들을 실천해 나가기를 원하고, 사람의 육체와 영혼 안에서 자라는 가라지들을 모두 제거하기를 원한다. 이상적인 것은 잘못을 전혀 범하지 않고 결함이 없는 순수하고 완전한 사람 그리고 순수한 교회이다. 이러한 시작은 쉽사리 경건주의로 빠져들게 한다. 사람들은 온 힘을 다 바쳐 교회 안에 존재하는 결함과 죄를 제거하고자 한다. 마태오는 아마도 이 비유를 자신의 공동체 안에 존재하는 경건주의자들을 겨냥하여 이 부분에 편집한 것 같다. 그런데 우리는 이 비유에서 우리 자신이 지닌 결함과 잘못들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가에 대하여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 비유를 통해서 우리 안에 있는 결함들을 강압적으로 몰아내려고 하는 경건주의적인 자세에 빠지지 않도록 우리 자신을 지키는 방법을 배울 수 있다. 예수님은 우리의 삶을 하느님이 좋은 씨앗을 뿌린 밭에 비유하고 있다. 그러나 나쁜 의도를 가진 원수가 밤중에 몰래 밀들 사이에 잡초 씨를 뿌려놓았다. 막 자라나고 있는 잡초들을 뽑아버리기 위해서 주인에게 묻는 일꾼들은 모든 종류의 잘못들을 즉시 제거하는 것을 선호하는 이상주의자들의 편에 서 있다. 그러나 주인은 다음과 같이 응답한다.
아니다. 너희가 가라지들을 거두어 내다가 밀까지 함께 뽑을지도 모른다. 수확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마태 13,29-30).
가라지 뿌리들이 밀 뿌리와 뒤얽혀 있어서 가라지를 뽑으면 밀도 함께 뽑힐 수 있다. 어떤 잘못도 범하지 않고 완벽하게 살아가고자 하는 사람은 그렇게 살아가려고 노력하면서 상당한 고통을 겪을 뿐 아니라. 그러한 노력과 고통 때문에 자신의 생명력도 파괴하게 된다. 그는 자신의 약점뿐 아니라 자신의 강점까지도 파괴하게 되는 것이다. 완벽한 존재로서 완벽하게 살아가고자 하는 사람의 밭에서는 오직 걱정에 가득 찬 밀들만 자라게 된다. 많은 이상주의자들이 자신의 영혼 안에 들어 있는 가라지들에만 신경을 쓰고 그것을 뽑아 없애버리는 일에만 지속적으로 관심을 두면서 헤어 나오지 못하여, 그들의 삶은 이러한 작업에 의해 상당히 고통을 받는다. 완벽함을 추구한 나머지 다른 일을 위한 마음이나 힘 또는 고생을 짊어질 여유가 없는 것이다. 가라지는 우리에게 불편한 것, 우리의 척도에 맞지 않는 것들을 모조리 밀어 집어넣은 어두운 그림자에 해당될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우리 안에 언제나 존재하는 것이다. 가라지 씨가 밤에 뿌려졌다는 것은 가라지가 바로 우리의 무의식 세계에 존재한다는 의미이다. 우리는 의식하고 있는 낮 동안에는 모든 부정적 요소들과 어두운 것들을 거슬러 싸워나갈 수 있으나, 밤에는 가라지 씨가 뿌려지는 일이 여전히 생겨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라지와 화해해야 한다. 그렇게 할 때 우리 삶의 밭에서 밀이 자랄 수 있는 것이다.
마지막 추수 때, 즉 우리에게 죽음의 시간이 다가왔을 때, 마침내 하느님께서 밀을 가라지와 분리시키실 것이고, 모든 가라지들을 모조리 불태우실 것이다. 가라지들을 불태우는 일은 우리가 이 땅 위에서 살고 있는 동안에는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만일 가라지를 불태우는 일이 우리의 지상 생애 중에 일어난다면, 우리는 우리 삶의 일부분을 그 일과 함께 희생하게 될 것이다.
예수님은 여러 상황에서 당신이 선택한 사람은 바로 약한 사람들과 가난한 사람들임을 보여주었다. 자신이 원하는 모든 것을 스스로 채워나갈 수 있고, 자신의 삶을 스스로 이끌어갈 수 있는 부자들은 하늘나라에서의 혼인잔치에 초대받지 않는다. 이와는 달리 가난한 자, 꼽추, 절름발이, 맹인들은 초대받는다(루카 14,12 이하). 원하는 것은 모두 소유하고 있어서 오만불손해진 부자는 자기 자신만이 가장 중요한 존재로 생각하지만, 결국에는 지옥에 떨어지고 만다. 불쌍한 라자로는 우리 안에 존재하는 가난하고 소외된 존재, 상처받은 자와 고통받는 자 그리고 배고픈 자와 목마른 자를 위해 있다. 그는 하늘나라에 올라간다. 하느님께서 받아들이는 사람은 바로 잃어버린 자와 압박받는 자다(‘잃었던 양 비유’와 ‘잃었던 아들 비유’).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은 사람은 하느님의 은총에 마음이 열려 있다. 예수님은 가난한 자, 배고픈 자와 정의를 갈망하는 자, 슬퍼하는 자, 자신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서 오직 하느님의 은총에만 손을 벌리고 있는 자들을 복된 사람으로 부르고 있다. 이들이 하느님 나라를 상속받을 자들이고, 자신들의 마음속에 하느님의 통치에 대한 감각이 있는 자들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이 사람이 되어오심 자체가 벌써 아래로부터의 영성을 알려주는 한 표지이다. 예수님 스스로 한 궁중에서 태어난 것이 아니라 마구간에서 태어났다. 한 나라의 중심인 수도에서 태어난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는 별 의미가 없는 지방인 베들레헴에서 태어났다. 융C. G. Jung은 우리 자신은 하느님이 탄생하시고자 하는 하나의 마구간임을 거듭 강조하고 있다. 우리의 내면은 마구간과 같이 매우 지저분하다. 우리 스스로는 하느님께 보여드릴 어떤 것도 가지고 있지 않다. 바로 우리가 가난하고 약한 존재이기 때문에 하느님이 우리 안에 살고자 하신다. 이와 같은 동기를 우리는 예수님의 세례에서 볼 수 있다. 예수님이 요르단 강에 섰을 때 하늘이 열렸었다. 요르단 강에서 세례자 요한이 수많은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었고, 요르단 강물은 사람들의 죄로 가득 차 있었다. 사람들의 죄로 가득 찬 요르단 강물에 서 있는 예수님에게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이 말씀하셨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마르 1,11).
이와 같은 현상이 우리에게도 일어날 수 있다. 우리가 예수님과 같이 요르단 강물 속에 들어가 우리 자신의 죄 위에 설 때. 하늘이 우리 위에 열리고 하느님께서 우리 존재 자체를 절대적으로 인정하시는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시게 된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 딸, 나는 너를 어여삐 여겼노라.
예수님은 십자가상의 죽음을 거쳐 죽음의 세계로 내려갔다. 초대교회는 예수님의 지옥행차die Höllenfahrt Jesu, den descensus ad inferos를 구원의 원형原型으로 보았다. 초대교회는 성주간의 성 토요일에 예수님의 땅속 깊은 곳으로 내려가심에 대하여 묵상했다. 더 이상 내려갈 곳이 없는 막다른 곳인 지옥, 모든 친교가 단절된 곳, 아무것도 더 이상 할 수 없는 곳, 철저히 고립되어 극심하게 외로운 곳, 바로 그곳에서 회개가 시작되고, 그곳에서 예수님이 사람들의 손을 잡아 삶의 영역으로 끌어올린다. 오리게네스 이후로 땅 아래 지옥으로 내려가는 표상은 그리스도가 우리의 영혼 안에 자리 잡고 있는 어둠의 세계로 들어가는 표상이 되었다. 대 마카리우스Makarius der Große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심연深淵은 너의 마음 안에 있고, 지옥은 너의 영혼 안에 있다.
초대교회 교부들은 영혼의 어두운 곳으로 그리스도가 들어가는 것을 구원의 행위로 보았다. 우리 영혼의 깊은 곳에 빛이 비치고, 억압되어 있던 모든 것들에 그리스도의 손길이 닿아 생명으로 일깨워진다. 아래로 내려가는 것과 위로 올라오는 것은 모든 종교에서 인간이 하느님에 의해 변화되는 것을 서술하는 표상들이다.
요한 복음에서는 아래로 내려감과 위로 올라감이라는 두 단어로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구원의 신비를 서술하고 있다.
하늘에서 내려온 이, 곧 사람의 아들 말고는 하늘로 올라간 이가 없다(요한 3,13).
만약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로 올라가기를 원한다면, 먼저 그리스도와 함께 땅으로, 세속적인 세계로, 우리 자신이 지니고 있는 인간성으로 내려가야 한다. 에페소인들에게 보낸 사도 바오로의 편지에도 이같은 안목으로 서술한 부분이 나오는데. 이 대목은 주님 승천 대축일 전례에서 인용된다.
“그분께서 올라가셨다”는 것은 그분께서 아주 낮은 곳 곧 땅으로 내려와 계셨다는 말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내려오셨던 그분이 바로 만물을 충만케 하시려고 가장 높은 하늘로 올라가신 분이십니다(예페 4,9-10).
아래로부터의 영성에 대한 고전적인 표현은 초대교회가 하나의 시편에 같이 사용하던 것이고, 이것을 사도 바오로는 필리피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인용하고 있다.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여느 사람처럼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도 그분을 드높이 올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그분께 주셨습니다(필립 2,6-9).
우리의 인간성으로 내려오는 것과 하늘로 올라가는 것 안에서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구원의 본질을 보았다. 그들은 여러 가지 새로운 표상들을 동원하여 하느님께서 인간으로 내려오신 것과 종의 신분을 취하시기까지 자신을 낮추신 것을 찬미했다.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표상들 안에서 하느님 사랑의 표현을 보았다. 이러한 것은 그리스도 이전에는 인간의 머리로는 상상도 할 수 없던 것이었다. 그리스도가 아래로 내려오는 것, 스스로를 낮추는 것kenosis은 우리가 하느님과 인간에 대하여 가지고 있던 모든 개념들을 완전히 뒤집어놓는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그리스도는 우리 삶의 모범이 되었다. 바오로는 우리에게 그리스도가 아래로 내려온 것처럼 행동할 것을 권면하고 있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바로 그 마음을 여러분 안에 간직하십시오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여느 사람처럼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도 그분을 드높이 올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그분께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의 이름 앞에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에 있는 자들이 다 무릎을 꿇고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라고 모두 고백하며 하느님 아버지께 영광을 드리게하셨습니다(필립 2,5).
[출처: 안셀름 그린, 『아래로부터의 영성』, 66-72쪽 참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