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리엔테이션
우리 신앙생활 정체성을 어떻게 찾아 나아갈 것인가?
모든 순간순간, 하루하루를 우리가 어떻게 말하고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행동하는가에 따라 우리 삶은 달라진다.
밝은 생활과 어두운 생활의 갈림길이 현재 우리 자신의 밝음과 어둠에 달려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파스카의 캠프를 만들면서
온 우주 만물이 태양으로부터 오는 햇빛을 반사하여서 자신의 밝음과 실존과 생존을 드러낸다. 우리 인간의 실존도 사랑 자체이시며 생명의 빛이시며 진리요 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살 때, 이 세상에서 하느님 나라를 살아나아가는 것이고, 그것이 우리 밝은 생활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날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신앙생활에서 멀어지고, 그 신앙의 정체성마저도 잃어버리고, 쉬는 교우, 냉담 교우가 적지 않다. 우리는 이러한 오늘의 현실 상황에서 ‘성가정신앙생활캠프장’을 열어서, 마치 구약성경 출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공동체가 약속의 땅으로 이동해가는 캠프(천막)를 만들고자 한다. 그들은 파스카 신앙생활을 통하여 끊임없이 항상 더 크신 야훼 하느님을 만나는 체험을 통하여 금송아지 우상숭배로 다시 돌아가지 않을 수 있었다. 우리도 우리 신앙생활의 정체성을 찾아 나아가는 우리 자신의 출애굽, 파스카 신앙생활을 영위해 나아가야 한다.
[ 가톨릭대학 성신교정, 지혜관으로 가는 길 ]
신앙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신앙생활의 정체성을 찾아 나아가는 해법은 루카복음 24장 25-32절까지 엠마오로 향하던 두 제자의 모습에 있다. 그들의 체험은 반드시 우리 자신도 거쳐야만 한다. 엠마오로 향하던 두 제자는 우연히 동행하게 된 낯선 이, 길 가던 동행자에게 자신들의 실의와 좌절로서 신앙생활 정체성을 잃어가는 사정을 이렇게 토로한다.
“나자렛 사람 예수님에 관한 일입니다. 그분은 하느님과 온 백성 앞에서, 행동과 말씀에 힘이 있는 예언자셨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수석 사제들과 지도자들이 그분을 넘겨, 사형 선고를 받아 십자가에 못 박히시게 하였습니다. 우리는 그분이야말로 이스라엘을 해방하실 분이라고 기대하였습니다. 그 일이 일어난 지도 벌써 사흘째가 됩니다. 그런데 우리 가운데 몇몇 여자가 우리를 깜짝 놀라게 하였습니다. 그들이 새벽에 무덤으로 갔다가, 그분의 시신을 찾지 못하고 돌아와서 하는 말이, 천사들의 발현까지 보았는데 그분께서 살아 계시다고 천사들이 일러 주더랍니다. 그래서 우리 동료 몇 사람이 무덤에 가서 보니 그 여자들이 말한 그대로였고, 그분은 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아, 어리석은 자들아! 예언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믿는 데에 마음이 어찌 이리 굼뜨냐? 그리스도는 그러한 고난을 겪고서 자기의 영광 속에 들어가야 하는 것이 아니냐?” 그리고 이어서 모세와 모든 예언자로부터 시작하여 성경 전체에 걸쳐 당신에 관한 기록들을 그들에게 설명해 주셨다. 그들이 찾아가던 마을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예수님께서는 더 멀리 가려고 하시는 듯하였다. 그러자 그들은 “저희와 함께 묵으십시오. 저녁때가 되어 가고 날도 이미 저물었습니다.” 하며 그분을 붙들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묵으시려고 그 집에 들어가셨다. 그들과 함께 식탁에 앉으셨을 때, 예수님께서는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그들에게 나누어 주셨다. 그러자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았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그들에게서 사라지셨다. 그들은 서로 말하였다.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나 성경을 풀이해 주실 때 속에서 우리 마음이 타오르지 않았던가!”
제자들은 해방자 나자렛 사람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기대가 실의와 좌절로 바뀌면서, 신앙생활의 정체성을 잃은 채 낙향 중이었다. 그러나 한 낯선 나그네로 함께 가던 부활하신 주님께서 하느님 말씀과 성경 말씀을 풀어 설명해주자, 그들의 마음은 성령의 불길로 타올랐다. 그 깨달음으로 더 크신 하느님을 체험할 수 있었다. 하늘보다도 높고 땅과 바다보다도 크고 깊은 하느님의 생각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하느님께서는 온 우주나 우리가 생각하는 그 어떤 것보다도 항상 더 크고 무한하시고 무량하시다. 자신이 믿는 하느님께 대한 실의와 좌절에 빠진 이들이 신앙생활의 정체성을 어디에서 찾아 나아갈 수 있을까?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나타나신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답을 찾아주신다. 이 성경 말씀의 장면같이 부활하신 주님을 우리 인생길에서 함께 가고, 이스라엘 백성공동체가 주님 약속의 땅으로 함께 합의하고 걸어간 이 만남의 성사는 파스카 공동체가 체험하는 시노달리타스 삶이다.
더 크신 하느님
하느님은 성령 안에 아들과 일치하는 관계를 통하여 당신을 드러내신다. 대인 관계는 여기서 하느님 안에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세상을 위해 낳으신 아들 안에서 보게 되는 내적이고 영원한 이 관계의 신비는 세상에까지 넘쳐흘러 나와, 인간을 만나고 그 인간에게 은혜로이 개방하고 있다. 예수님 안에는 친자관계 설정되어있고 거기에는 온 인류가 들어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이 체험은 고대 유다교 안에 고유하게 간직해오고 있던 하느님 사상을 밝혀주고 있다. 그것은 그분 안에 모든 빛을 밝혀주면서 봄꽃이 봉오리를 퍼뜨리는 것처럼 개화되고 있다. 그 체험은 ‘더 크신’ 하느님을, 율법보다 더 크시고 이스라엘보다 더 크시며, 인간의 마음보다 더 크신 하느님을 보게 해 준다. 그러나 그 하느님은 항상 같은 유일한 하느님,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모세의 하느님. 예언자들의 하느님이시다. 그렇게 예수님은 모두에게 자신의 과도한 개방을 통해 유일하신 하느님과 아버지의 친밀하고 풍요가 넘치는 삶을 계시하시면서 인간들 사이를 통과하셨다(엘루아 르클레르, 『더 크신 하느님』, 가톨릭출판사, 70쪽 참조).
그렇게 나자렛 예수님은 동반자로서 우리와 함께 걸어가신다.
당신을 알기 위해 사랑하게 하소서!
<성가정신앙생활캠프>는 이스라엘 백성공동체같이 파스카 신앙생활 공동체로서 온라인 인터넷상으로 함께 걷고, 부활하신 주님 체험을 통하여 잃어가는 자신의 신앙생활의 정체성을 찾아 나가려 한다. 그리고 아우구스티누스 성인같이 “주님! 당신을 사랑하기 위하여서 당신을 알게 하여 주소서! 또한 당신을 알게 하기 위하여서 당신을 사랑하게 하소서!”하고 끊임없이 기도 생활해야 한다. 안다는 것과 사랑한다는 것이 톱니바퀴같이 서로 맞물려서 그 어느 것이든지 먼저 돌아가지 않으면 서로 맞물려서 함께 돌아갈 수가 없다. 사실 대인 관계에서 자신의 일방적인 생각과 판단을 강요하다 보면, 변덕스러운 사랑과 편견으로 그릇된 자기애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서에 전하고 기도 생활 중에 우리가 만나는 하느님은 항상 더 크신 변함없는 사랑 그 자체신분이다.
하느님의 내리사랑
한편 성경이 전하고 기도 생활 중에 체험하고 만나는 항상 더 크신 하느님의 내리사랑에 대해서 이제는 무슨 할 말이 있단 말인가? 아우구스티누스 성인께서는 유일하고 참된 하느님을 알고 진리와 사랑의 연인이 되셨다. 성인은 “주님! 당신이 사랑 자체이심을 알고 나서는 너무나 당신을 늦게 알았습니다. 내 마음이 착잡하나이다”라고 <고백록> 1장에서 고백하셨다. 하느님의 내리사랑을 알고 나서부터는, 그 하느님 사랑의 배신자로서 일평생 동안 회개 생활로 응답하셨다. 회개란, 하느님 아버지의 내리사랑으로 돌아가서 그 내리사랑으로 하느님과 이웃을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사랑하는 삶을 살아 나아가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 인간을 가장 크게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은 항상 더 크신 하느님의 사랑만큼 그 이상 가는 것을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을 수많은 성인 성녀들의 변화에서 증명하고 있다. 성인 성녀들은 회개한 죄인들이시기 때문이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이야말로 항상 더 크신 하느님을 체험하고 만난 그 순간부터 회개 생활로 그 내리사랑을 실천하신 위대한 성인이셨다. “당신의 얼굴을 언제 뵈오리이까?”하는 동경과 순례 끝에서 사랑의 무한성과 영원성, 사랑의 완성을 체험하였다. 인간의 사랑은 변할 수 있다. 그래서 배신감도 느끼고 상대방에 따라서 서로 변할 수 있는 것이 사랑이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이 체험하고 만난 하느님의 사랑은 항상 더 크시며 변함없는 무한하고 영원한 사랑이다. 그 사랑 앞에 자신의 인간 사랑이 무엇이길래 그리 기억하고 잊지 않으시며 사랑만 하시나이까, 라는 고백이 나온다. 항상 문제는 하느님께 있지 않고 인간에게 있는 그 문제의 사랑을 풀기만 하고 응답하시는 하느님께 우리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그 무엇인가? 죄인인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무한한 자비 사랑에 감사로 응답할 길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는 것이다.
바오로 사도는 숨을 쉬듯이 감사한다. 바오로 사도의 살아있다는 생명의 호흡은 감사 행위라고 말해도 좋다. 생명을 주시니 호흡하듯이 마시고 그 생명을 내쉬는 감사다. 그래야만 사람은 살아있다고 할 수 있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은 궁핍함을 굽어보시는 당신께서 당신 자비를 선사하셨다고 한다(아우구스티누스, 『고백록』, 경세원, 24쪽 이하; 성염 역주 381쪽 참조).
“늦게야, 당신을 사랑했습니다!”
하느님의 무한하신 자비와 사랑으로만 우리 한계성과 상대성의 인간은 구원받을 수 있다. 나의 중력, 만유인력으로 존재하는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있을 수 있듯이, 인간 사랑의 중력만이 우리 인간 구원자의 사랑을 확인한다. 우리 인간은 이 구원의 사랑에, 진리를 두고서 나머지 평생을 두고 끊임없이 되뇌던 저 탄식, 철학적인 유언인 고백을 할 따름이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의 사랑 고백이다.
“늦게야, 당신을 사랑했습니다. 그토록 오래고 그토록 새로운 아름다움이시여, 늦게야 당신을 사랑했습니다.
내가 만날 항상 더 크신 하느님을 …
당신 사랑은 제게 보여줍니다.
햇살처럼 비껴 오시는 당신
인간의 모든 사랑은 당신 사랑의 작은 반사들임을 …”
만남은 사랑의 빛이다. 교황 프란치스코께서는 매일미사 강론에서 ‘진리는 만남’이라고 말씀하셨다.
만남은 시노달리타스로서 함께 걷는 길이다. 만남은 사랑의 빛이며 생명의 기원이다.
<성가정생활캠프장>에서 우리 신앙생활의 정체성을 찾아 나아갑시다. 만남의 성사 생활로서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같이,
시노달리타스의 동행자로서 성가정신앙생활, 공동체생활로서 우리 신앙생활의 정체성을 찾아서 확립하여 나아갑시다.
캠프장 안충석 루카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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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확실한 삶을 돌파하는 50가지 생각의 도구, 철학은 삶의 무기가 어떻게 되는가?』
야마구치 슈 지음/김윤경 옮김 145~148쪽
붕괴된 가족과 공동체의 새로운 대안 ; 게마인샤프트와 게젤샤프트
페르디난트 퇴니에스 (Ferdinand Tonnies, 1855~1936) : 독일의 사회학자. 공동체에서 게마인샤프트(공동사회)와 게젤샤프트(이익사회)의 사회 진화론을 주장한 것으로 유명하다. 노동조합과 협동조합운동에 참가하고, 핀란드와 아일랜드의 독립운동을 지원하는 등 사회개혁운동에도 적극 관여했다. 독일의 킬 대학교에서 철학과 사회학 교수를 역임했으나, 나치즘과 반유대주의를 공공연히 비난했다는 이유로 직위를 박탈당했다.
가족간의 만남과 가족 공동체 의식을 위하여 이 교수는 우리사회에 소셜미디어가 새로운 가족 유대나 가족공동체에 그 대안 역할을 대신할 대안을 제시한다.
게마인샤프트는 지연이나 혈연 등으로 깊이 연결되어 있는 자연 발생적인 커뮤니티를, 게젤샤프트는 이익이나 기능, 역할에 의해 연결된 인위적인 커뮤니티를 뜻한다. 원래 독일어로 게마인샤프트는 ‘공동체’, 게젤샤프트는 ‘사회’를 의미한다.
페르디난트 퇴니에스에 의하면 인간 사회는 근대화 과정에서 지연이나 혈연, 우정으로 깊이 연결된 자연 발생적인 게마인샤프트가 이익이나 기능을 우선으로 추구하는 게젤샤프트로 점차 옮겨간다. 더불어 퇴니에스는 이 과정에서 인간관계 자체는 소원해진다고 생각했다. 기능을 중시하는 게젤샤프트에서는 사회나 조직이 일종 의 시스템으로 기능하게 된다. 게젤샤프트에 소속된 개인의 권리와 의무는 '명확'해지며, 그때까지 인정에 약하고 감정적인 인간관계는 이해관계에 기초한 이성적인 인간관계로 바뀌어 간다.
정말 그럴까? 퇴니에스는 헤겔보다 조금 뒤의 시대, 그리고 마르크스와는 거의 동시대를 살았던 인물이다. 그 영향 때문인지 그의 사상에는 전반적으로 역사는 어딘가의 종착점을 향해 불가역적으로 진전한다는 전제가 암묵적으로 깔려 있다.
확실히 근대 이후의 일본 역사를 돌아보면 과연 퇴니에스의 예언대로다. 전쟁 전 일본에서 많은 국민의 아이덴티티를 형성하는 데 기반이 된 것은 '촌락 공동체', 즉 게마인샤프트였다. 대부분의 사람 들이 태어난 장소에서 이동하지 않고 부모의 직업(대부분 농업)을 이어받았고, 태어날 때부터 소속된 지연과 혈연으로 맺어진 커뮤니티 에서 이탈하는 일 없이 그곳에서 제약과 감시, 도움과 지원을 받으면서 일생을 보냈던 것이다. 하지만 전쟁이 끝난 후, 특히 고도의 경 제 성장기에 들어서면서 도시의 기업이나 점포가 대규모의 인원을 필요로 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사람들은 이른바 집단 취직과 같은 형태로 나고 자란 게마인샤프트를 떠나 기업이라는 커뮤니티에 속 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이 기업이라는 커뮤니티를 퇴니에스가 정의한 의미의 게젤샤프트로 볼 수 있을까? 기업을 게젤샤프트라고 말하기는 애매하다. 기업에는 종신고용, 연공서열, 노동조합이라는 세 가지의 특수 한 제도가 있기 때문이다. 이 세 가지 제도가 있으면 왜 게젤샤프트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일까?
종신고용은 평생 돌봐 주는 대신 충성을 다할 것을 약속하는 것 이다. 연공서열은 커뮤니티 내에서는 연장자가 상대적으로 존경받고 중용되는 것을, 노동조합은 동료의 고용을 함께 지키고 누군가가 해고되지 않도록 단결할 것을 약속하는 것이다. 이 세 가지 제도는 각각'평생 돌봐 드리겠습니다' '연장자를 소중히 대하겠습니다.
'단결해서 개인을 지키겠습니다'라는 뜻이며, 이는 곧 촌락 공동체 에서 암묵적으로 전제되었던 약속인 셈이다. 이 밖에도 기업에서 실시하는 체육대회와 같은 행사나 서로의 경조사를 챙기는 상부상조 문화 역시 붕괴되기 시작한 촌락 공동체를 다른 형태의 게마인샤프트인 기업이 계승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게젤샤프트를 역할과 기능에 기초한 결속 관계로, 게마인샤프트를 우애와 혈연에 기초한 결속 관계로 생각하면, 이 두 커뮤니티 가 함께 보장되지 않는 한 생산성과 건전성이 양립된 사회를 만들기 는 어려울 것이다. 오늘날에는 최소한 대기업에서는 게마인샤프트적인 요소가 이미 완전히 붕괴되었으며 머지않아 미국에 등장하리라 예상되는 '완전한' 게젤샤프트로 옮겨갈 것이다. 그렇다면 전쟁 전에는 촌락 공동체가, 이후 고도의 경제 성장기부터 거품 경제 시 기까지는 기업이 담당하던 게마인샤프트의 역할은 무엇이 담당하게 될 것인가? 열쇠는 '소셜미디어'와 '두 번째 명함'에 있다. 너무 낙천적이고 순진한 생각 아니냐고 물을지 모르겠지만, 만약 회사나 가족의 해체가 불가역적 흐름이라고 한다면 인류에게는 그에 맞는 새로운 구조가 필요하다. 철학자 프리드리히 텐부르크는 사회 전체를 이루는 구조가 해체되면 그 아래 단계에 있는 구조 단위의 자립성이 높아진다고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회사나 가족의 해체에 대응해서 이른바 역사의 필연으로 새로운 사회적 유대의 형성이 요구된다. 낙관적인 관점이지만 소셜미디어가 그 역할을 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걸어본다.
내가 만날 항상 더 크신 사랑의 주님께 청하는 기도
내가 아무리 만나도 충분하지 않은 자기 자신보다도 더 자기 같으신
사랑의 주님 내가 만날 항상 더 크신 사랑의 주님!
나의 전부이신 주님과 함께 동행하시는 실의와 좌절 중에 엠마오로 향하는 두 제자같이
눈이 가리어 언제나 낯선 타인 같으신 사랑의 주님!
나와 동행하시어 길에서 말씀하실 때에 속에서 우리 마음이 타오르게 하시어
주님 사랑이 제 안에 타오르게 하신 사랑의 주님!
내가 만날 항상 더 크신 사랑의 주님 체험은 율법보다 더 크시고
이스라엘보다 더 크시며 인간의 마음보다 더 크신 사랑의 주님!
사랑의 숨바꼭질로 숨어 계신 주님 모습은 내가 만날 항상 더 크신 사랑의 주님을
항상 새롭게 시작하는 사랑의 기쁨을 주시려는 까닭이오나이다.
죽음보다 강한 사랑의 심연으로 내가 만날 항상 더 크신 사랑의 주님 안에
항상 거듭나는 자기 자신을 발견하나이다.
모든 것을 믿는 데에 마음이 어찌 굼뜨나 하신 나의 굼뜬 마음 안에 부어주십시오.
내가 만날 항상 더 크신 사랑의 주님!

